[소설]봉순이 언니(63)

  • 입력 1998년 7월 6일 19시 56분


이모는 아까 내가 따라 들어설 때부터 어머니와 무슨 약조가 있었는지, 나를 향해 벙어리같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모 일어설 때 짱이 너도 일어서자, 뭐 이런 신호였다. 하지만 나는 계속 주스잔만 붙들고 있었다. 나는 어리니까, 이제 겨우 여섯살이니까 못 알아들었다면 그뿐일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어쨌든 봉순이언니가 그토록 강경하게 막지 않았다면 이모는 아마 나를 끌어내어서라도 집으로 데려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봉순이 언니는 이모보다 더 강경했고 이모는 이런 자리에서 아이를 두고 승강이 하는 것이 겸연쩍었는지 그럼, 하고 애매하게 남자를 향해 웃고는,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째려본 후에 자리를 떠 버렸다.

이제 형부가 될 그와 봉순이 언니와 내가 앉아 있었다. 봉순이 언니는 고개를 숙인 채 거즈손수건을 쥐고 있었고, 나는 탁자 밑으로 들어가 봉순이 언니의 치마자락을 잡아 당기며 장난을 쳤다. 봉순이언니는 거북살스러운 듯 내 손을 몇번 치우다가 나중에는 탁자 밑으로 고개를 갸웃 숙이고 나를 따라 낄낄 웃었다. 형부가 될 그의 크으으음 헛기침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렸다.

―저어, 아직 식사 전이시면 어디가서 식사라도 하실까요?

형부가 될 그 사람은 정말 할말이 없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를 향해 히죽히죽 웃고 있던 봉순이언니는 아버지가 지난 일본 출장에서 처음 사다준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더니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내가 탁자 밑에서 봉순이 언니의 스커트를 잡아당기며 그러라고 하라고,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고 더 놀다가 느즈막이 집에 들어가자고 고개짓을 하지 않았다면 봉순이 언니는 나를 데리고 그냥 집으로 와 버렸을 것이다. 언니는 이 자리가 싫고 이 남자가 맘에 들지 않아 죽겠는 표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것 때문이었을까, 봉순이 언니가 그날 그대로 일어서서 나를 데리고 그대로 집으로 와버렸다면 그녀의 일생은 바뀌었을까.

처음에 이 일을 회상하면서 나는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언니의 삶은 아주 달라졌을 거라고, 아무리 어린 아이고 아무 악의도 없었지만 내가 결국 봉순이 언니의 불행에 개입한 것은 아닐까, 얼마간 자책감이 들기도 했었고, 이토록 사소한 일이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구나 결국, 산다는 일에는 사소한 게 없는 거구나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후 나는 생각을 바꾸었던 것 같다. 그래,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봉순이 언니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지만, 아마도 그건 다른 방식으로 불행해졌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삶에서 사소한 일이 없는 이유는, 사소한 그 일이 바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이기 때문에 결국 사소한 그 단서가 아니라 그 사소한 것의 방향을 트는 삶의 덩어리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심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말에 탁자 밖으로 빠져나왔다. 형부가 될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나는 그가, 얼굴이 검고 콩기름을 바른 마루청처럼 반들거리는 그가 괜찮게 생각되었다. 그건 나를 음험한 눈으로 쏘아보던 병식인지 하는 총각의 눈과는 분명 달랐다. 어쨌든 그는 아이를 낳아본 아비였고 그래서였을 것이다.

공지영 글·오명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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