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 (9)

  • 입력 1998년 5월 8일 19시 17분


하지만 낮의 부산함이 끝나고 집 마당에 어머니가 아끼던 희미한 알전구가 켜질 무렵에도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고모들이 골목을 서성거리고 좁은 마당이 달뜬 기다림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했을 때 봉순이 언니는 나를 업고 주인집 부엌으로 갔다. 주인집 부엌에는 그 집에서 식모일을 하던 처녀가 막 상을 차려가지고 안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언니는 언제 숨겨왔는지 녹두지짐이 하나를 그 집 식모에게 내밀었다.

―숭늉은 내가 끓여 놓을게… 천천히 밥먹고 나와.

평소에는 그 둘은 그렇게 다정한 사이가 아니었다. 봉순이 언니 말에 따르면 그 집 식모가 자기는 주인집 식모이니 셋집 사는 사람의 식모인 너와는 격이 다르다며 자신을 깔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녹두지짐이를 받아든 그 집 식모는 얼굴이 부드러워졌고 이내 녹두지짐이를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물었다.

―짱아 아버지 미국에서 오시는겨?

―그러엄.

―니집두 부자 되겄네?

―그럼.

봉순이 언니는 전에 없이 의기양양했고 안집 식모는 전에 없이 고분고분 상을 들고 안방으로 갔다. 봉순이 언니는 마당에서 물을 한바가지 퍼서 가마솥에 붓고는 나무주걱으로 솥을 박박 긁어 누른 밥을 만들었다. 거기까지는 그저 의례적인 행동이거니 했었는데 문득 이상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내가 얼굴을 묻고 있는 언니의 등으로 싸늘한 땀내가 풍겨왔던 것이다.

언니는 주인집 식모가 상을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간 사이 부엌 구석에서 무언가를 쓰윽 손으로 집어내더니 서둘러 우리집쪽으로 걸었다. 봉순이 언니의 등에서 느껴지던 싸늘한 냉기가 후줄근하게 데워지면서 언니는 부엌쪽을 기웃거리다가 나와 봉순이 언니가 쓰고 있는 골방으로 들어섰다. 등에서 나를 내려놓고 언니는 잇몸이 빨갛게 드러나도록 씨익 웃으면서 손아귀를 폈다. 새까맣고 반짝반짝하며 기인 생명체들이 언니의 손아귀에서 놓여나자마자 서둘러 움직였고 이내 사라졌다. 그 까만 생명체들이 전해주는 야릇한 빛깔이 언니의 눈에서 반짝이는 눈초리와 겹쳐 내게 이상한 흥분감을 전해주었다. 언니는 문밖을 살며시 내다보더니 둘째 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로 내게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내 얼굴이 의혹으로 찌푸려지자 언니는 내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저게 돈 벌레여. 저것이 득시글거리는 집은 돈이 꼬이게 되어 있댜… 안집 정자가 내가 저걸 훔쳐갈까봐 눈에 불을 켜고 있었는디….

봉순이 언니는 빨간 잇몸을 드러내며 다시 히히, 웃었다. 언니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길다랗게 까만 벌레에 대해 얼떨떨해 있는 나를 번쩍 안아들더니 다시 말했다.

―이젠 우리 부자가 되는 거여, 알겠지? 짱아 아버지도 미국에서 돌아오시고 이젠 우린 부자가 되는 거라구. 하지만 엄마한테는 내가 그 벌레 훔쳐왔다는 말 해지 말어…. 비밀이 새나가지 않아야 효험이 있는겨.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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