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5)

  • 입력 1998년 5월 4일 19시 30분


이쯤 되면 나는 무서움에 사로잡혀 언니의 치마끈을 더욱 움켜잡았다. 그러면 봉순이 언니는 용수철처럼 발딱 일어나 내가 부여잡고 있는 치마꼬리를 억지로 떼어놓고는 한껏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무울이 다아 끄을어었다아… 어서 짱이를 잡아먹을 주운비이를 헤에라아….

장난이겠지, 이건 장난이겠지 하면서도 당황해 바라보면 어느 순간 봉순이 언니는 없었다. 시멘트를 얇게 펴바른 마당에 햇볕이 하얗게 튀어오르고 이어서 해바라기의 황금빛 갈기같은 꽃이파리가 부옇게 부풀어 오르고 나면 초라한 집안의 풍경이 모두 지워지고 나는 그 이야기 속의 아이처럼 빈 집에, 햇볕만 미친듯이 백색으로 끓어오르는 빈집에 서 있는 것이다. 그 공포는 그 당시보다도 그 이후의 내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댄 것이었는데 나는 스물 몇살이 넘어서 집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학교에서 돌아와 아파트의 현관벨을 누를 때마다, 집안 식구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기까지의 몇초 동안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마치 문이 열리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식구들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백색의 햇볕 내려 부서지는 하얗게 바랜 집터만 남아 있을 것 같은 환상들…. 어쨌든 어린 시절의 언니는 내가 그 이후에 계속 겪게 될 그 이상한 공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지 하얗게 질려 서 있는 나를 향해 다시 장난을 시작했다.

―짱이르을 자압아 머억자아… 무울이 다아 끄을어었다아아….

나는 그러면 뒤꼍으로 뛰어가, 내 키보다 훨씬 큰 싸리빗자루 뒤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숨기고는 내가 뛰어오는 모습을 고소한 표정으로 훔쳐보고 서 있는 언니의 치맛자락을 이 세상 끝나도록 놓지않겠다는듯이 움켜잡았고 울음은 그 다음에야 터뜨렸다. 그러면 언니는 나를 번쩍 안아 뱅그르르 재주도 좋게 등뒤로 돌려 업었다. 언니의 눈 앞에서 등 뒤로 옮겨지는 그 찰나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 시간이 주는 기분은 무서운 이야기보다도 짜릿한 것이어서 나는 그저 언니의 뜨뜻하고 넓적한 등에 얼굴을 박고는,

―또 그러면 엄마한테 이를 거야. 목욕탕 가서 빠뜨린 거 다 이를 거야

하고 협박을 해댔지만 기실 나의 마음은 어느새 언니의 얼굴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언니의 등으로 울려퍼져 내 앞가슴을 콩콩 때리는 봉순이 언니의 웃음소리에 풀어져 있곤 했다. 그러면 봉순이언니는 나를 풀썩 고쳐 업고는 동네로 마실을 가곤 했었다. 언니의 등뒤에서 사실은 언니의 뜨뜻한 등으로 느끼는 체온에 이미 마음이 풀어져버려서 해댔던 협박은 이런 것이었다.

그 당시 동네의 산비탈을 다 내려가서 아현초등학교 못미친 곳에 목욕탕이 생긴 이후로 어머니는 우리들을 일주일에 한번씩 동네 목욕탕으로 보내곤 했었는데 이미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언니와 오빠가 학교로 가고 난 후, 어머니 대신 언제나 나를 그곳에 데리고 가는 것은 봉순이 언니였다. 새로 나온 빨갛고 파란 예쁜 플라스틱 대야에 빨랫비누와 수건을 챙겨가지고 우리는 목욕탕으로 갔다. 언니가 빨랫비누를 아껴가며 긴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물가에서 장난을 치거나 했는데 한번은 언니가 무슨 생각인지 커다란 욕조 속에 얇게 둘러진 발디딤 판에다 나를 앉혀 놓았었다. 물살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 나는 가라앉고 있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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