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4)

  • 입력 1998년 5월 4일 07시 50분


우리가 쓰는 마당은 주인집과는 좀 떨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주인집과 우리가 사는 집 사이의 마당에 마치 경계선이라도 긋듯이 사과궤짝을 이어 놓고 흙을 담고 해바라기를 심어 놓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하필 호박이나 오이, 그도 아니면 고추나 파라도 심지 않고 해바라기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쌀이 떨어지기를 곗날 돌아오듯 했다고 어머니가 회고하던 그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가을이면 봉순이 언니가 해바라기 씨를 따서 우리들은 식사와 식사 사이에 간식으로 그것을 얻어먹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이들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눈꼽 사탕 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해마다 해바라기를 심고 꽃이 피면 그 황금빛 갈기같은 꽃잎을 보며 말했다. 우리들에게 말했다. 참 예쁘지 않니?

어쨌든 어머니가 외가에서 경영하는 남대문 시장의 가게로 나가고 언니와 오빠가 학교로 가고 안집조차 비면 그 마당엔 늘 봉순이 언니와 내가 남았다. 봉순이 언니는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마당 한편 담그늘 밑에, 모서리가 둥그렇게 닳아빠진 빨래판을 베고 앉아 나를 그 무릎에 앉히고는, 그때는 아직 작았던 내 손톱이랑 발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언니곁을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봉순이 언니는 언제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돼갔구, 갸는 아무것두 모르구 새 어미가 시키는 대로 심부름을 갔었던겨. 먼 데를 댕겨오다 보니께 돌아오는 길에 그만 깜깜한 밤이 돼버렸댜, 그래두 갸가 착했으니께 무서운 것을 꾹 참구설라므네 열심히 집으로 달려왔지. 집 앞 대문에 당도해설랑은 지 새 에미를 불렀어. 엄니이이, 심부름 갔다 왔슈우….

언니는 이 대목 쯤에서는 목소리를 괴기영화의 그것처럼 가늘게 떨며 무릎에 앉혔던 나를 조금 떼어놓았다. 나는 다음 말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언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만일 언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가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므로 잠깐의 무력한 승강이 끝에 언니와 하는 수 없이 조금 떨어져서, 하지만 언니의 검정 치마 한꼬리는 여전히 꼭 잡은 채 무서움을 참고 있었다. 언니는 내가 무서워하는 것이 귀여워 못견디겠다는 듯 웃음을 잔뜩 참은 얼굴을 감추며 내게 말했다.

―그러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인겨?… 사람도 는데 문이 열리는 거여. 갸가 집으로 들어갔지. 근데 이게 또 무슨 일이랴? 아까 낮에 심부름을 갈 때까지만 해두 멀쩡하던 집이 다 없어지고 캄캄한 빈 터만 남은 거여… 갸는 집을 잘못 찾아 왔나 하고 대문밖으로 다시 나가보았지. 집 앞의 골목길에 서 있는 버드나무며 옆집이며 모두다 그대로야. 시방 내가 꿈을 꾸는 것두 아닐테고, 여긴 분명 우리집인데… 갸는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갔지. 역시 거시기여… 깜깜한 속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누가 갸의 이름을 불러… 돌아보니께 대문이 덜컹, 닫히고 말았어. 잠긴 거여. 이자 갸는 나갈 수도 없게 됐는데 그러자 모습은 안보이구설라므네 갸 새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어… 무울이 다아 끄을어었다아… 어서 아이를 잡아 먹을 준비를 해에라아.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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