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임연철/어이없는 문화재 소실

  • 입력 1998년 2월 12일 19시 35분


▼한불수호조약(1886)으로 서울의 천주교 신자가 눈에 띄게 늘어가던 1891년 한 벽안의 신부가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가는 약전현(藥田峴)을 오르며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약초밭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언덕을 오르다 마침내 신부는 신유박해(1801)이래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뿌린 서소문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서 발길을 멈췄다. 명동성당이 착공되던 1892년에 준공된 한국 최고(最古)의 성당 약현성당이 프랑스인 두세신부에 의해 터를 잡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벽돌건물인데다 국내에 세워진 ‘뾰족탑’으로 불리는 고딕식 교회 건물의 원조란 점에서 약현성당이 갖는 교회사적 건축사적 의미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남녀가 유별했던 당시 관습 때문에 교회 중간에 남녀 구별용 칸막이를 한 것이 그 후 교회 건축에 반영됐던 사실만 보아도 이 성당건물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유서깊은 역사 때문에 국가 사적(史蹟)으로까지 지정된 약현성당이 한 부랑인의 방화로 종탑 일부가 무너져내리고 내부가 소실됐다는 뉴스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다. 84년 화순 쌍봉사 대웅전의 촛불 실화나 86년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의 방화로 인한 전소도 귀중한 문화재의 소실이어서 큰 안타까움을 안겨줬는데 이번 사건은 낮에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나 더욱 충격적이다. ▼종교 건축물은 성격상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음을 생각할 때 방범 취약 시간대인 평일 아침에 텅 빈 상태로 놔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IMF사태속에 사회적 불안이 깊어질수록 이상성격자들에 의한 뜻밖의 사고가 엉뚱하게 문화재를 훼손할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 소유단체들은 소명감있는 관리대책을 세워야겠다. 임연철<논설위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