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김장호/딸가족 덕분에 「컴맹탈출」

  • 입력 1998년 2월 3일 07시 22분


멀티미디어 시대요, 인터넷이 판을 치는 세상에 ‘컴맹’이라니 자존심이 상했다. 딸이 쓰던 구형 컴퓨터를 물려받아 설치했지만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초등학생인 외손자에게 기초부터 하나하나 배우며 시행착오를 반복하는데 노신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할아버진 교장선생님이셨다면서 컴퓨터도 배우지 못하셨어요”라는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컴퓨터가 처음 등장할 무렵 신임 교사가 교내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알량한 권위의식 때문이었다. 이제는 발등의 불이기에 체면 불구하고 묻기를 거듭하며 연습한 결과 기초는 어느 정도 터득했다. 하지만 타자 실력이 빵점인데다 눈까지 어두우니 실수가 잦을 수밖에. 진땀을 흘리며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외손자가 고개를 돌린 채 킥킥거리니 좌불안석이었다. 이를 악물고 두드려보지만 마음만 급할 뿐 손가락은 여전히 굼벵이었다. 잠시 강아지가 눈뜨듯 성취감에 흥분하다가도 아차 실수로 꼬마선생의 핀잔이 쏟아지면 피가 역류하기도 했으나 ‘와신상담’,참고 또 참았다. 초보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하기까지 1주일이 꼬박 걸렸다. 이어 대학교수인 사위를 강사로 바꿔 실습에 들어가니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인터넷 초보단계까지 끝내고 나니 문명의 이기가 지닌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기도 크게 올랐다. 사위는 명강사인데다 내가 명색이 장인이니 세밀한 부분까지 차근차근 챙겨주었다.낮시간에 연습하다가 이상이 생겨 딸까지 동원했더니 “아버지는 늙어 무슨 궁상이세요”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고 큰소리까지 치면서 굼벵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았던가. 딸네 식구 모두를 강사로 모시고서야 간신히 컴맹을 면하게 됐다. 큰 아들이 컴퓨터회사 사장이요, 둘째 사위가 대학교수인데도 컴맹이라고 악의없이 희롱하던 동료들도 내 실력을 보더니 격찬을 늘어 놓았다. ‘배움에는 때가 있다’는 말을 실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배움에는 끝이 없음을 되뇌게 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배워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스레 음미해 본다. 김장호(서울 서초구 반포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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