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하일지판 아라비안 나이트(593)

  • 입력 1997년 12월 24일 08시 07분


제10화 저마다의 슬픈 사연들 〈61〉 섬에 도착한 배는 닻을 내렸습니다. 이어 흑인노예 열 명이 상륙하였는데 그들은 저마다 괭이나 광주리 따위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행장이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게 여겨졌기 때문에 나는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감추고 그들의 일거일동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운명을 결정짓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배에서 내린 흑인노예들은 섬 한가운데까지 걸어오더니 발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땅을 파다보니 철판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여럿이 힘을 모아 그것을 들어올렸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덮개를 연 것이었습니다. 일이 끝나자 일동은 배로 돌아가 온갖 물건들을 옮겨오기 시작했습니다. 빵, 밀가루, 꿀, 과일, 투명 버터, 음료수가 든 가죽 부대, 갖가지 집기, 식기, 가구, 양탄자, 가죽깔개, 거울, 갖가지 내의 등 살림살이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운반해 와서는 덮개 밑으로 운반해 갔습니다. 옮겨와야할 물건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수십 차례에 걸쳐 덮개 밑 지하와 배 사이를 왕복해야 했습니다. 물건 옮기는 일이 끝나자 노예들은 다시 배로 돌아갔고, 마지막으로 값비싼 비단으로 된 더없이 화려한 옷들을 날라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 일행과 함께 노인 한 사람이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폭삭 늙어빠진 노인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온갖 풍상을 모질게 겪어온 듯한 얼굴로 남아 있는 것은 누런 의복에 싸인 앙상한 뼈 뿐이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앞날을 재촉하는 듯 바람은 노인의 앙상한 어깨 위로 불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저만치 오고 있는 노인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노인은 너무나도 기품 있고, 애잔하리만큼 아름다운 미소년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 젊은이는 미의 거푸집에 부어서 만든 것처럼 아름다웠는데, 그 아름다움은 세상의 이야깃거리가 될만했습니다. 젊은이는 어린 사슴 같이 귀엽고 영롱하며, 움트는 나뭇잎처럼 청순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황홀해지고 곱고 건드러진 그의 몸매를 보면 누구라도 넋이 녹아버릴 것 같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소문난 미녀도 그 젊은이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무색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젊은이를 보자 나는 절로 깊은 한숨이 터져나왔습니다. 마침내 일동은 노인과 젊은이를 데리고 철판 덮개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한 시간이나, 아니 그 이상이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에도 나는 그 아름다운 젊은이를 다시 보기 위해서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다시 철판 덮개가 열리고 하나 둘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열 명의 노예들이 나오고 그 노인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젊은이는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젊은이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철판을 덮고 그 위에 표나지 않게 흙을 덮었습니다. 일이 끝나자 일동은 배로 돌아가더니 돛을 올리고 섬을 떠났습니다. <글: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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