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하일지판 아라비안 나이트(579)

  • 입력 1997년 12월 10일 08시 25분


제10화 저마다의 슬픈 사연들 〈47〉 그런데 우리가 도착한 그 도시로 말할 것 같으면 예로부터 문물이 발달하여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중에는 학문 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배가 닿자 이 나라의 왕이 파견한 관리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배에 올라와 선장과 상인들에게 인사하고, 무사히 도착한 것을 축하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임금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도착을 환영하며, 여러분들에게 이 두루마리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이 두루마리에다 각자 한 구절씩 글을 적어주셔야겠습니다. 무슨 내용이라도 그건 상관 않겠습니다』 그러자 상인들 중 하나가 물었습니다. 『그건 왜죠? 왜 우리가 각자 글을 적어야 하는 거죠?』 『그건 말요, 필체가 뛰어난 사람을 찾기 위해서랍니다. 얼마전에 이 나라에서는 서예가로 유명했던 대신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신이 세상을 뜨자 임금님께서는 몹시 애석해하시며 그분 못지 않은 명필이 아니면 후임 대신으로 기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님께서는 모든 백성들은 물론, 외국에서 들어오는 배의 선원들이나 상인들에게까지 글을 쓰게 하여 필체를 시험해보고 계시답니다』 이렇게 말하고난 관리는 두루마리를 펼쳐놓았습니다. 그것은 폭이 한 완척, 길이가 십 완척이나 되는 커다란 두루마리였습니다. 『선장님부터 한 구절 쓰시죠』 선원들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장은 빙그레 웃으며 시 한 구절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어 글을 쓸 줄 아는 모든 선원들과 모든 상인들이 나름나름으로 한 구절씩 글을 썼습니다. 그 일이 끝나자 관리는 그것을 거두어 가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나는 잽싸게 그것은 낚아챘습니다. 그리고는 갑판 위로 달아났습니다. 그걸 본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쳤습니다. 내가 그것을 찢어버리거나 바다에 던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염려했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그들을 향하여 나는 손짓으로 글을 쓸 줄 안다는 시늉을 해보였습니다. 그러자 선원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직 글을 쓰는 원숭이는 본 적이 없어. 저놈은 기어이 말썽을 부릴 작정이야』 그때 선장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럴 게 아니라 정말 저놈이 글을 쓸 줄 아는지 한번 시험해보기로 합시다. 만약 저놈이 정말 글을 쓸 줄 안다면 이건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 신통한 원숭이가 세상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만약 저놈이 글을 쓸 줄 안다면 나는 저놈을 내 양자로 삼겠소. 그러나 반대로 쓸 줄도 모르면서 공연히 두루마리만 버려놓는다면 나는 여러분들의 뜻에 따라 저놈을 아예 밟아 죽여버리겠소』 선장의 이 말에 사람들은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나에게 붓을 갖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관리는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요? 원숭이에게 글을 쓰게 하다니?』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갑판 위에 두루마리를 펼쳐놓고는 설레는 가슴으로 붓을 잡아들었습니다. <글: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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