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이덕애/뒤바뀐「스승과 제자」

  • 입력 1997년 11월 15일 09시 27분


적게 낳아 잘 키우려는 부모들의 욕심주머니를 겨냥한듯 과외비는 해마다 바람넣은 풍선처럼 자꾸만 올라 주부들의 생활고 시름은 두께를 더해간다. 그래서 레슨비를 절약해 가계에 다소나마 여유를 얻고자 체르니 100번까지 치다가 그친 어설픈 피아노 실력을 딸에게 발휘해보기로 했다. 딸아이와 진지한 대화로 합의도 봤으니 자랑할만한 솜씨는 아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전부였다. 『허리를 쭉 펴고 배꼽은 열쇠구멍 위치에 오게 하고』 하자 딸은 재빠르게 자세를 고쳐 앉는다. 『자, 이젠 책을 보세요』 나의 설렘과 딸의 진지한 태도로 레슨이 시작됐다. 처음엔 집안일만 하던 엄마의 호칭이 선생님으로 바뀐 것 하나만으로도 딸은 흡족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차가운 타박에 딸은 점차 표정이 일그러지면서도 고삐잡힌 소처럼 억지로 따라와주었다. 반년정도 지나자 이치를 깨우치며 가르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잘 이해했다. 진도가 점점 깊어지고 음표 보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자 재미없다는듯 서서히 불만을 토해내더니 마침내 엄마의 실력을 탓하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딸과의 마찰이 잦아지면서 자존심이 상하고 더는 가르칠 수도 없어 급기야 학원에 등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몇년이 흐른 지금은 나의 실력을 훨씬 뛰어넘어 체르니 40번을 친다. 언젠가 딸아이의 방에서 옛날 내가 좋아했던 와이먼의 「은파」가 흘러나왔다.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슬며시 딸의 곁에 다가앉았다. 눈은 악보와 딸의 손가락을 번갈아가며 바쁘게 쫓아다녔다. 딸의 손가락은 마치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 같은 유연성 그 자체였다. 지금은 스승과 제자가 뒤바뀌어 가끔씩 딸의 지도를 받는다. 오늘도 모녀가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서 와이먼의 「은파」를 열심히 가르치고 재미있게 배운다. 음표를 읽는 속도도 더디기만 하다. 이미 굳어버린 나의 손가락을 제 손으로 이쪽저쪽 옮겨놓더니 『엄마는 정말 답답해』 하며 예쁘게 눈을 흘긴다. 엄마가 스승일 때와는 달리 타박도 없다. 혼자서 마냥 답답해 하는 기특한 딸을 쳐다보면서 열심히 음표를 읽고 건반에 손가락을 얹는다. 이덕애(인천 부평구 청천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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