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부에 7분간의 드라마를 기대할 수는 없을까.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는 딱 4개월 남았다. 축구의 90분 경기로 치면 7분쯤 된다. 차범근 축구팀은 월드컵 최종예선 한일 1차전에서 마지막 7분간 대역전 드라마를 펼쳤다.
일본팀이 선취골을 넣고 나서 서정원 선수가 동점골을 터뜨리기까지는 18분이 걸렸다. 5년 임기의 정권 시계로 환산하면 1년에 해당한다.
많은 국민은 지고 있던 그 18분간 희망이 무너져내리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 경제의 최근 1년간도 국민을 비슷한 상황으로 몰아넣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축구에선 절망 직전에 환희를 맛보았다. 경제에서도 그런 기대를 가져볼 수 있을까.
김대통령은 20일 마지막 시정연설에서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대통령의 책무에 있는 힘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연한 얘기다. 임기말이라고 해서, 상황이 뜻같지 않다고 해서 남은 임기를 허송한다면 국가적 손실이 될 것이다. 국정 공백에 따른 불안가중의 코스트를 국민이 지불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실점 만회할 시간 있다 ▼
그동안의 실패에서 겸허하게 배우면서 마무리를 잘 한다면 축구의 역전 드라마까지는 아닐지라도 현정부의 실점을 적잖게 만회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의 책무완수 표명만으로 악재의 지뢰밭에서 비틀거리는 경제가 쉽게 풀릴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각 포지션의 선수들이 실점 뒤에 전열을 가다듬고 저마다 최선을 다한 차범근 축구팀처럼 정부 전체가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통령의 잔여 임기가 4개월이라는 타이밍 감각을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경제엔 임기가 없다는 강경식 부총리의 말은 맞지만 지금 「새 판」을 짜보겠다면 역시 무리다.
현정부 경제운용의 남은 넉달간의 역할은 극도의 시장 혼란을 완화하는데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면 이상적인 시스템만 원론적으로 강조할 것이 아니라 우선 고장난 곳을 수리하는 일에 관련 주체들과 손발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대증요법을 쓰라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구조조정을 위한 정비부터 하라는 뜻이다.
이를 위해 기업과 금융부문 등의 당면 애로를 먼저 경청하고 그들의 입장에 최대한 다가서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 무원칙정책 불신 자초 ▼
현 경제팀은 각 경제주체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못해왔다. 「시장주의」를 만병통치약인양 되뇌면서 재계와는 대치국면을 조성한지 오래다. 진짜 시장의 소리는 자주 무시하면서 고답적 자세를 보여왔다.
지난 4월엔 경제장관들이 무역업계와 한달에 한번씩 만나 무역진흥협의회를 갖기로 약속해놓고 그때 딱 한번 얼굴을 보이고는 끝이다. 취업난 비명이 하늘을 찌르는데도 이를 조금이라도 완화할 방도를 찾기 위해 업계와 머리를 맞대는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정부다. 일본의 장관과 관리들이 취업 빙하기(氷河期)라고 불리던 재작년과 작년에 너나없이 관련업계를 찾아다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겉으로는 「시장자율」을 외치면서 뒷전에선 「이 기업은 살려라, 저 기업은 안된다」며 뒤죽박죽 무원칙의 관치금융 관행을 답습해왔다. 「못믿을 정부」를 그래서 자초한 셈이다.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데 거기서 내놓는 대책에 쉽게 믿음이 가겠는가. 차라리 「시장경제」 소리를 빼고 솔직하게 업계의 협조를 구하는 것보다 못한 결과가 빚어지는 것이다.
증시의, 기업의, 은행의, 명퇴자의, 취업재수생의 불안에 정면에서 답하는 자세와 애정이 없고서야 아무리 머리가 좋은 정책당국자라 한들 경제주체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배인준<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