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문 속에 갇혀있던 추상적 법규범은 구체적 사건에서 법원의 해석 적용을 통해 판결로 선고됨으로써 비로소 생명을 지닌 현실적 규범으로 태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판결을 「살아있는 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일 선고된 한보사건 판결은 또 다른 의미에서 「살아있는 판결」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형법 등에 규정된 추상적인 뇌물의 개념을 국민의 법감정과 상식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했기 때문이다.
한보사건 재판부는 공무원의 직무와 금품수수가 전체적으로 「대가관계」가 있으면 뇌물로 볼 수 있으며 특별히 청탁이나 구체적 대가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또 정치인이 정치자금이라고 생각하고 받았더라도 뇌물로서의 실체가 있으면 뇌물로 봐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뇌물은 뇌물」이라는 당연한 상식을 확인한 것이다.
판결이 선고되자 법정에서는 『시원하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렸다.
이 광경을 보면서 뇌물에 대한 검찰의 태도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검찰은 뇌물에 대해 답답할 정도로 형식논리에 치우친 해석을 해왔다.
「구체적 청탁」이니, 「대가성(代價性)」이니 하면서 뇌물의 개념을 축소지향적으로 해석해 온 것이다. 그 결과는 「세계 최고의 떡값」을 기록하는 국가적 불명예로 나타나기도 했다.
「떡값」에 관한 한 한보사건 재수사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사팀은 鄭泰守(정태수)한보그룹 총회장에게서 돈을 받은 정치인 32명 중 8명만 기소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혐의처리했다.
『모두 선거자금이나 정치후원금 명목으로 돈을 받는 등 대가성이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한보 재판부의 「살아있는 판결」로 검찰의 이런 설명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
공익의 대표자인 검찰은 공익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적어도 51%의 유죄가능성만 있어도 기소하는게 정도(正道)가 아니었을까.
이수형 <사회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