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허미숙/구두와 삶은 계란

  • 입력 1997년 4월 9일 09시 44분


모처럼 빨랫감을 가지고 냇가에 나갔다. 어느새 만발한 주위의 개나리와 진달래를 보니 멀지않아 아카시아도 필거라는 생각에 문득 초여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제사가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에 결혼했다. 아버지는 자식 일곱을 키우시느라 잡숫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을 참으셨다. 아버지는 언젠가 구두를 한번 신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는데 누구 하나 사드리지 못했다. 나는 그때 직장생활을 했지만 월급을 모두 적금에 넣었다. 철이 들었더라면 첫월급으로 구두를 사드렸을텐데…. 아버지가 그렇게 갑자기 간암으로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의사는 보름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언니는 무언가 지피는데가 있는지 돈을 드리며 구두나 사 신으시라고 했다. 소화가 안돼 묽은 죽밖에 못 잡수셔 과일도 갈아드려야 했다. 평소 삶은 계란을 좋아하신 아버지는 『퇴원하면 계란을 실컷 먹고싶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란은 한 개도 못잡숫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 아버지는 시트 밑에 간직했던 언니가 드린 돈을 어머니 손에 쥐어주시며 『아무래도 구두를 못신어 볼 것 같아.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당신이나 신구료』하셨다. 내가 첫아이 갖고 입덧할 때 유난히 삶은 계란이 먹고싶었다. 그때 매일 계란을 먹으면서 아버지 생각에 목이 메곤 했다. 아버지가 조금만 더 살아계셨더라면 잘해드렸을텐데…. 하지만 혼자 되신 어머니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제사에도 참석 못한 것이 몇년째다. 올해는 꼭 참석, 제삿상에 삶은 계란을 한사발 담아놓으리라. 허미숙(경남 진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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