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국민 우롱한 정태수씨

  • 입력 1997년 4월 7일 20시 11분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막을 올린 국회 한보청문회가 시작부터 어두운 전망을 던지고 있다. 청문회가 국민적 의혹을 속시원하게 밝히는 자리가 되기보다는 국민들의 불만을 일시적으로 해소시키는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당초의 부정적 예상이 적중하는 듯한 예감마저 들게 한다. 청문회 뚜껑이 열리자마자 이런 청문회라면 왜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울분의 소리가 높다. 어제 서울구치소에서 TV 생중계로 진행된 鄭泰守(정태수)씨의 증언은 한마디로 국회와 국민에 대한 철저한 우롱으로 일관했다. 정씨는 시종 모른다, 기억 안난다, 말할 수 없다는 말로 청문회위원들의 추궁을 비켜갔다. 자신의 부도덕한 기업경영으로 나라 전체가 깊은 수렁에 빠져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기막힌 상황인데도 마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를 던졌을 뿐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씨는 오만방자하고 후안무치했다. 이미 명백한 증거가 드러났거나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발표하고 시인한 사안에 대해서조차 『재판중인 사건이어서 답변할 수 없다』는 뻔뻔한 말로 청문회위원들을 흥분시켰다. 도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잡아뗄 수 있는 것인지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결국 특혜대출의 「몸통」에 대해서도, 「정태수 리스트」에 대해서도, 金賢哲(김현철)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92년 대선자금에 대해서도 청문회는 정씨로부터 시원한 답변을 얻어내지 못했다. 정씨의 불성실한 답변과 국회를 모독한 듯한 자세, 증언의 거짓 여부, 정씨를 차후 다시 한번 증언대에 세울 것인지 여부는 앞으로 국회에서 따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문회에 임하는 국회의원들의 자세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자물통」으로 소문난 정씨를 심문하면서 정씨의 자발적 진술에 모든 것을 거는 듯한 자세로 접근한 것 자체가 무책(無策)이었다. 더구나 오만한 증인 앞에서 증언은 제쳐놓고 여야당이 서로 상대방 흠집내기로 낯뜨거운 언쟁을 벌이는 모습은 한마디로 추태였다. 한보청문회는 국민을 엄청난 분노로 몰아넣은 정경유착의 진상을 의혹없이 밝히고 이 땅에 깨끗하고 정직한 정치관행을 세우기 위해 국민적 합의로 열린 역사적 증언장이다. 증인들도 청문회위원들도 이 점을 명심하고 국민과 역사 앞에 한점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도록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특히 증인들은 이번 기회가 국민앞에 속죄하는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청문회에 임해야 할 것이다. 다시는 정씨의 경우와 같은 부정직하고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되풀이 돼서는 안된다. 국민을 우롱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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