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광장/귀순자 체험기]고영환/北동포는 굶주리는데…

  • 입력 1997년 2월 23일 20시 08분


지난달 아들 돌이 돼서 오랜만에 주위 분들을 모시려고 예약차 집근처 괜찮은 음식점 몇군데를 찾아다녔다. 시설과 음식맛은 물론이고 요즘에는 주차장도 따져야 한다기에 주로 뷔페식당을 둘러 봤다. 한마디로 깜짝 놀랐다. 토 일요일은 좋은 시간의 예약이 거의 끝나 있었다. 돌 생일 회갑 고희 팔순 친목계 동창회 향우회 등등 무슨 모임이 그리 많은지. 평일에도 유명한 뷔페는 대부분 사람들로 가득했다. 겨우 한곳에서 예약을 마쳤다. 버릇처럼 북한동포들 생각이 났다. 그 많은 형제들이 굶주리고 있다는데 이곳에서는 고급음식점들이 넘쳐나고 먹다 버리는 음식도 엄청나다. 생일 얘기가 나왔지만 북한에서는 생일 하면 으레 김일성 생일인 4월15일과 김정일 생일인 2월16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이틀 연속 쉬는 날은 이 두번의 생일 때 뿐이다. 경제사정이 괜찮을 때는 특별배급도 나오곤 해 북한주민들에게는 큰 명절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이 배를 곯고 있는 올해같은 상황에서도 김정일의 생일잔치를 뻑적지근하게 치렀다는 소식에는 분노와 함께 슬픔을 느낀다. 도대체 국민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일잔치란 말인가. 이른바 「노동당의 수슬로프(구소련의 유명한 사상이론가)」로 여겨졌던 황장엽비서가 망명하는 판에 경축 보고대회와 충성의 편지 이어달리기 등 바깥세상에서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생일잔치를 요란하게 벌일 수 있단 말인가. 북한외교부에 근무하던 당시 4월15일이나 2월16일이 가까워지면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외국의 국가지도자나 정계 학계 재계 요인들이 김일성 김정일에게 축전 축하편지 축하선물 등을 보내도록 담당국가 공관원들을 들볶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두차례의 생일이 공무원들, 특히 외교관들에게는 일반주민들처럼 명절이 아니라 참으로 부담스럽고 곤혹스런 날이었다. 더욱이 접수된 축하내용을 김일성부자에게 보고할 때 혹시 보고문건에 오자 탈자라도 하나 있게 되면 「혁명화(탄광 등에 가서 노동하는 것)」대상이 되거나 엄중한 경고처분이 따르니 영 죽을 지경이었다. 북한의 일반주민들 가운데서는 살림이나 계급이 괜찮은 사람들 정도가 생일모임을 갖는다. 친척까지 초청해 생일을 치르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북한의 식량사정이 극도로 어려운 때에 뷔페식당에서 아들놈 돌을 치른 것이 영 께름칙하다. 고영환 ▼약력▼ △44세 △평양외국어대 졸 △북한외교부 자이르 콩고대사관 근무 △91년 망명 △북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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