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하얀 눈썹과 설날의 추억

  • 입력 1997년 2월 6일 18시 55분


차례상에 올릴 약과를 만들려고 재료를 준비하면서 밀가루가 하얗게 묻은 손을 보니 단발머리 소녀시절의 설날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시절 어른들은 섣달 그믐날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 정말 눈썹이 변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밀려오는 잠을 참으면서 음식 만드는 어머니의 손놀림을 구경하고 있었으나 나는 어느새 잠에 빠졌다. 꿈 속에서도 손꼽아 기다리던 명절을 맞아 친구들과 한창 즐겁게 놀고 있을 때 『얘, 현숙아. 어서 일어나 보렴』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 거울을 보니 정말 내 눈썹이 하얗게 변해버린 거였다. 『빨리 일어나서 다행이지 조금만 더 잤어도 새하얗게 될뻔 했구나』 옆에서 웃으시는 어머니는 밤새워 음식을 만드셨는지 고소한 기름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큰일 났네. 난 이제 할머니가 됐나봐』 태산같은 걱정을 하며 세수를 하니 하얀 눈썹은 말끔히 씻어졌고 횃대에 걸려있던 때때옷이 나를 기다렸다. 빨강치마 분홍저고리. 며칠전부터 설빔을 준비하신 할머니가 숯불 다리미로 다려 놓으신 것이다. 떠들썩한 새해 아침. 차례준비하러 모여드는 작은댁 식구들.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둔 조용한 성품의 작은할머니는 정초에 여자가 먼저 집안에 들어서는 게 아니라면서 꼭 나이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들어오셨다. 남색치마에 색동저고리를 차려입고 으스대며 나타나는 숙자는 내또래다. 자주 싸워서 정이 들었는지 만나면 반가웠다. 차례를 지낸 뒤 과일을 받아 봉지에 넣고 다니며 사과 반쪽 대추 한알도 누구 것이 더 큰지 대보곤 했다. 새옷 입고 나온 봉순이 순덕이 영순이와 동네 아이들은 양지바른 토담옆에 옹기종기 둘러서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세뱃돈 자랑을 했다. 아름답고 정겹게만 느껴지는 설날의 추억들. 그믐날 밤 눈썹을 하얗게 만든 것은 약과 만드시던 어머니 손의 떡가루였음을 알았지만 하얀 눈썹은 아름다운 추억의 한 부분으로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남아있다. 30년전 그 설날을 다시 맞으며 벌써부터 세뱃돈 타령만 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추억거리를 만들어줄까 고심하고 있다. 이현숙(서울 동작구 신대방 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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