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는 못했지만 극지방에 빙산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어쩐지 이 빙산에 대해서 나는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눈으로 덮여 벌판을 이루고 있을 것이고, 투명한 얼음을 여기저기에서 그대로 내비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깨끗한 햇살을 받아 물감을 풀어놓은 듯 시리도록 파란 바다 위에 떠있을 것이다.
또 거기에는 펭귄이 혹은 바다사자가 있어 생명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더구나 그 거대한 얼음섬이 해류를 따라 움직인다니 이것은 정말 숨막히는 장관일 것이다.
요약하자면 낭만과 청순함, 젊음, 약동, 그리고 신비와 겸손함. 빙산을 생각할 때면 나는 대개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며 가슴벅차했다. 사진이나 TV를 통해 빙산을 볼 때는 더욱 절실했었다. 기회만 있으면 빙산의 숨결을 느껴보리라고 열 번쯤 다짐을 했었다. 나에게 빙산은 그런 연인이었다.
얼마 전에도 TV를 통해 우연히 빙산을 느낄 기회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연이 아니었다. 에스키모들의 생활을 보여주는데 어찌 빙산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예상은 적중했다. 화면은 빙산을 스치고 지나갔고 나는 재회를 즐겼다. 하지만 뒤따르는 짧은 만남에 대한 아쉬움. 그래도 거기에서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 프로그램은 빙산에 대한 내용도 일부 담고 있었다. 이어지는 빙산의 모습. 해류에 밀려 다니는 빙산은 때로는 서로 부딪히기도 한다고 했다. 그럴 때면 그 거대한 몸뚱아리가 중심을 잃게 되고 다시 균형을 잡기 위해 기우뚱거린다. 자연히 주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감당하기 어려운 물결이 덮쳐온다. 그 서슬에 짐승들도 놀라고 어선들이 대피한다. 나는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었다. 환상이 깨졌다.
어쩌면 내 생활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사는 동안 기우뚱 중심을 잃을 충격을 무수히 받았을 것이고 그 때마다 바로 서고자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 몸부림에 누가 다쳤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때로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저울추를 뺏은 적도 있었을 것이다.
중심을 잃은 때의 파장은 몸집이 클수록 크다. 그리고 균형을 잡기 위해 더 많은 저울추가 필요하다. 하지만 균형을 잡기위해 추를 꼭 더 가져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반대쪽의 추를 덜어내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살고 싶다.
황인홍<한림대교수·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