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위독한 아버지를 뵙고…

  • 입력 1997년 1월 17일 20시 19분


간밤에 친정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친정 아버지가 그간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 퇴원하셨는데 아무래도 이번은 힘들 것 같으니 한번 다녀가라는 말이었다. 친정 형제가 모두 한 도시에 사는데 유독 나만 객지에 떨어져 산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연락을 하지 않는데 언니가 연락을 한 걸 보니 심상치 않다 싶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어린 아들은 어린이집에 맡기고 부산행 열차를 탔다. 결혼한 뒤 나 혼자 친정에 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눈물 콧물 범벅으로 한참 울고 있을 때 옆자리 여인도 함께 울고 있었다.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중국동포였다. 한자로 뜻을 통해본 바 죽고 싶다며 한국병원에 입원중인 아버지가 위독해 다녀가는 길이란다. 서로 비슷한 처지라 말은 통하지 않지만 손을 잡고 위로하며 울다 보니 부산이었다. 1시간 정도면 갈 거리인데 내 살기 바쁘다고 명절 때도 제대로 찾아뵙지 못한 친정 부모님. 평일 낮이었는데도 형제들이 모두 모였다. 아버지는 이미 말문이 닫히고 숨결이 가랑거렸다. 다리는 피가 통하지 않아 싸늘했으나 자식들이 왔노라는 말에 감은 눈가로 눈물이 젖어나는 걸로 보아 아직 약간의 의식은 있는 듯했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이 조그만 집에서 우리 다섯형제가 자라났고 18년전 바로 그 자리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나이 스무살 때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스산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가 너무 젊었던 때였기에. 어머니는 행여 누워계신 아버지 몸에서 나쁜 냄새라도 날까 봐 수시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히시며 몸을 만져주셨다. 자식들 고생 안시키려면 춥지 않을 때 가셔야 하는데 혼자 남아 외로울 걸 생각하니 해동하고 봄에나 가셨으면 한다는 어머니. 아버지가 무슨 암호처럼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표시하면 알아 듣고 얘기하시는 어머니. 두분이 함께 해로한 동안 공유한 온갖 사연들이 저렇듯 하나로 만들었을 테지. 그래서 더 오래 사신 분들이 부부밖에는 없다는 말을 하셨겠지. 아버지를 뵙고 대구로 돌아올 때는 마음의 준비가 돼 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누워 계셨던 그 자리에 이제는 아버지가 누워 계시듯이 인생이란 그저 자리바꿈이 아닐까. 순간 순간을 더 소중하게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곽 미 화(대구 수성구 범물동 범물1단지 105동 1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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