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전성기 누리는 F1
기업 스폰서 금액 총 3조 원 육박… 머신-드라이버는 ‘달리는 광고판’
‘신비주의’ 벗고 대중스포츠로 변신… 중계 다변화-현장 관중 대폭 상승
“친환경 역행 대회” 비판 잇따르자… 엔진출력 줄이고 하이브리드 강화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붕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은 국제자동차연맹(FIA)의 최상위 경주 대회인 ‘포뮬러 1(F1)’ 팬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전 세계를 순회하며 열리는 F1 그랑프리(경기) 4월 일정이 취소되어 버린 것이다.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릴 예정이던 두 경기가 모두 취소되면서 올 시즌 F1 경기는 24번에서 22번으로 줄었다. 팬들은 11, 12월에 예정된 시즌 마지막 경기인 카타르와 아부다비 그랑프리만큼은 취소되지 않기를 기다리고 있다.
F1은 스포츠 중에도 특히 중동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취소된 두 경기를 포함해 이번 시즌 경기는 총 21개국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이 중 종주국인 영국을 포함해 유럽에서 가장 많은 9경기가 치러진다. 그다음으로 많은 경기가 열리는 곳이 아시아(8경기)다. 이 중 4경기가 중동에서 치러진다. 중동에 F1을 움직이는 ‘전주(錢主)’들이 있기 때문이다.
● 시속 300km 질주 속 스폰서 기업들의 ‘홍보 전쟁’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F1의 최대 스폰서 중 하나다. 머신(F1 경주차)이 지나가는 서킷의 안전 방호벽에는 아람코의 로고가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카타르항공도 큰손이다. 중계 카메라가 헬기나 드론에서 서킷을 잡을 때 헤어핀(유턴에 가까운 수준의 급코너) 구간에 있는 완충구역(차가 밀려나가도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만든 공터) 곳곳에 카타르항공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F1은 단일 스폰서가 쓰는 돈의 액수가 전체 프로 스포츠 업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포츠 및 엔터테인먼트 스폰서십 데이터 분석 업체 ‘스폰서유나이티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F1의 스폰서 총액은 20억400만 달러(약 2조9527억 원)로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의 20억4900만 달러(약 3조267억 원)보다는 뒤진다. 하지만 단일 스폰서사가 후원하는 평균 금액은 601만 달러(약 88억5008만 원)로 NFL(74만5000 달러)에 비해 월등히 많다.
F1에 돈이 몰리는 구조는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년 계약을 체결하는 스폰서가 많기 때문이다. 명품 기업인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는 지난해부터 10년간 F1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 총액 10억 달러(약 1조5000억 원) 이상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우승자가 결정되는 결승 직선 구간(피트 스트레이트)을 포함해 중계 카메라가 서킷을 고정적으로 잡는 위치에는 늘 루이뷔통 로고가 함께 화면에 잡힌다. 출발 시간을 알리는 시계 아래에는 이 회사 브랜드인 태그호이어 마크가 그려져 있다. 2013년 이후 12년간 붙어 있던 롤렉스 상표를 밀어내고 얻은 자리다. 아람코와 하이네켄 등도 ‘일단’은 2030년까지 F1 스폰서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
기업들이 이처럼 천문학적 돈을 쏟아붓는 이유는 당연히 인기 때문이다. F1 사무국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시청자 수는 18억3000만 명이었다. 2009년 5억여 명 대비 3배 이상으로 불어난 숫자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유튜브나 SNS 등으로 끊임없이 콘텐츠가 재생산되면서 F1으로 유입되는 사람을 계속해서 늘리고 있다.
● ‘구태’를 버리자 인기가 왔다
역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F1이지만 항상 이 같은 인기를 누린 것은 아니다.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미국 디트로이트를 비롯한 자동차 산업이 휘청일 때 F1 역시 존폐를 논해야 할 정도의 암흑기를 겪었다.
자동차 업계가 휘청이면서 이 시기 많은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F1 서킷을 떠났다. ‘BMW 자우버’라는 팀명으로 F1에 참가하던 BMW가 2010년을 끝으로 F1에서 손을 뗐고 일본의 유력 자동차회사인 혼다와 도요타도 운영하던 F1팀을 각각 2009, 2010년을 끝으로 매각했다. 두 일본 자동차회사가 서킷에 머무른 기간은 혼다가 3년, 도요타가 8년이다.
내부적 문제도 있었다. 2007년 맥라렌 F1팀이 페라리의 머신 설계 자료를 통째로 빼돌리다 적발됐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F1은 ‘우승과 돈에 눈이 멀어 부패로 가득 찬 스포츠’라는 이미지가 박혔다. 여기에 2006년을 끝으로 F1에 천문학적 돈을 쏟아부었던 담배회사의 스폰서십이 금지되면서 F1은 긴 침체기에 빠진다.
F1을 침체의 늪에서 건져 올린 사람은 미국의 미디어 관계자들이었다. 중심엔 ‘숀 브래치스’라는 인물이 있다. 당시 ‘리버티 미디어(스포츠, 엔터 관련 미디어 사업 회사)’ 관계자로 향후 F1 상업부문 총괄에 오른 브래치스는 F1의 그간 상황을 뜯어본 뒤 운영 방침을 뿌리부터 뜯어고치기로 한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F1을 ‘귀족 스포츠’에서 ‘대중 스포츠’로 바꾸고, ‘성역’을 없애는 것이었다.
과거 F1 시장의 운영 방침은 무조건 ‘돈’이었다. 언제나 팀과 F1 운영사가 가장 많은 돈을 받는 방식으로 결정했다. TV 중계는 중계권료를 더 많이 주는 유료 스포츠 채널에서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서킷의 경주 자체가 아닌 차고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선수와 스태프의 무전은 일반 시청자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도록 해 ‘신비화(化) 전략’을 유지했다.
하지만 브래치스는 모든 걸 뒤집었다. 세계 최대 영상 스트리밍 기업 넷플릭스를 끌어들여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F1, 본능의 질주’라는 이름으로 2019년 시리즈 방영이 시작된 후 F1 서킷을 찾는 관중은 420만 명에서 지난해 675만 명으로 늘었다. 2019년 첫해에는 총 10개 팀 중 8개 팀만 촬영에 응했지만 다음 시즌에는 모든 팀이 협조했다.
중계도 달라졌다. 현재 경기 전후 중계 카메라는 출전팀의 피트(차고지)를 들쑤시고 다닌다. 경기 중에는 머신에 달린 카메라가 실시간으로 ‘드라이버 시점’에서 화면을 비춰 박진감을 더한다. 욕설만 ‘삐’ 소리로 걷어낸 스태프와 드라이버의 무전이 수시로 적나라하게 중계된다. 국내 독점 중계사인 쿠팡플레이의 실시간 채팅창도 드라이버의 무전이 공개될 때마다 불이 붙는다.
중계 방식도 확장됐다. 기존에 많은 중계권료를 내는 기성 TV를 중심으로 중계권을 판매했다면 브래치스는 자체 중계 플랫폼인 ‘F1 TV’를 만들어 인터넷 구독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기존에 자국 중계권을 가진 매체의 독점권은 존중하되, 그렇지 않은 주요 F1 인기 국가에는 자체 플랫폼으로 소비자들을 직접 공략했다. 그는 ‘부유층’을 공략하려던 기존의 돈 버는 공식을 뒤집고 ‘남녀노소 누구나 열광할 수 있는 F1’을 만들었다. 그 결과 F1은 뜨뜻미지근했던 미국 시장의 인기까지 덤으로 얻었다.
● 규칙이 바뀌면 강자도 바뀐다
올해는 F1 기술 규정도 대폭 바뀌었다. 대회의 명칭부터 ‘포뮬러 1’인 만큼 기술 규정이 바뀌면 강자와 약자도 순식간에 뒤바뀌는 스포츠가 바로 F1이다.
올해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을 대폭 확대한 점이다. 자동차 경주가 환경친화적이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F1 운영 당국은 엔진 크기를 계속 줄이면서 하이브리드 시스템 출력 비중을 늘려 왔다. 지난해까지는 엔진이 출력의 80%를, 하이브리드 시스템(전기모터)이 20%를 담당했다. 하지만 올해는 하이브리드의 출력 비중을 45% 이상, 최대 50%까지 크게 높였다.
이렇게 되자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남들보다 빨리 연구했던 메르세데스벤츠 팀이 시즌 초부터 1위로 치고 올라왔다. 4월까지 3경기를 치렀는데 여기서 모두 벤츠 드라이버가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아직 약관(弱冠)도 되지 않은 벤츠의 드라이버 키미 안토넬리(19)는 3경기 중 2경기에서 1위를, 1경기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 베테랑들을 압도하고 있다. “역사를 배울 나이에 역사를 쓰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반면 2021년부터 4년간 최종 1위, 지난해 최종 2위에 올랐던 레드불 레이싱의 강호 막스 페르스타펀(28)은 현재 9위까지 뒤처졌다. 레드불 팀은 이번 시즌부터 자체 개발한 엔진과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쓰기 시작했는데,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까지 10개이던 참가 팀이 11개로 늘어난 점도 변수다. 미국 GM 산하 브랜드 캐딜락이 새로이 합류했다. 짐 캠벨 GM퍼포먼스 및 모터스포츠 커머셜 운영 부문 부사장은 “팬과 대회 영향력의 성장세를 볼 때 F1에 진입하기에 올해가 가장 적정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며 “인디카, 나스카 등 다양한 대회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과를 증명할 것”이라고 전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