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호 “스포츠는 장애인들 사회 안착 위한 최고의 무기”

  • 동아일보

23일 취임하는 이명호 장애인체육회장

지난달 25일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훈련원 원장실에서 만난 이명호 당선자가 평창 패럴림픽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지난달 25일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훈련원 원장실에서 만난 이명호 당선자가 평창 패럴림픽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아이는 기어서라도 밖에 나가려 했다. 부모님은 그런 아이를 들어 기어이 집으로 데려왔다. 아이는 손님이 오면 거실에도 못 나갔다.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방이었다.

 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아이는 방에서 혼자 글을 익혔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독서를 통해 세상을 배웠고, 목발을 짚고 세상을 누비고 다녔다. 지난달 선거를 통해 대한장애인체육회 차기 수장이 된 이명호 당선자(60) 얘기다. 장애인체육회는 1만5000여 명의 엘리트 선수와 40만여 명의 생활체육인을 책임지는 조직이다. 연간 예산은 600억 원에 달한다.

 “걸음마를 뗄 무렵 갑자기 고열이 났대요. 감기인 줄 알고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는데 그게 잘못된 거죠. 처음에는 전신이 마비돼 목도 가누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3남 1녀 중 장남인 저를 살리겠다고 하루에 병원 7곳을 돌아다닌 적도 있답니다. 그래도 낫지 않자 포기하고 집에만 두신 거죠. 부모님 모두 대학을 나오셨는데도 장애인에 대한 당시 인식을 넘어서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10대 후반에 부산으로 갔던 이 당선자는 가족이 서울로 돌아간 뒤 홀로 부산에 남았다. 더는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22세에 한 재활원에 들어간 그는 목공예를 배우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목공예 공장에 취직했는데 생활은 힘들었습니다. 비장애인에 비해 작업량이 적어 월급이 얼마 안 됐거든요. 그래서 시계 수리 기술을 배워 점포를 차렸는데 일본의 전자시계가 쏟아져 나오면서 얼마 못 가 가게 문을 닫았죠. 돈과는 인연이 없었던 거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중창단, 선교 봉사활동 등을 하며 부지런히 살던 그가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역도를 접하면서였다. 1984년 전국장애인체전에 부산 대표로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장애인체육의 길로 들어선 그는 1999년 방콕 아시아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에서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작은 회사에 취직해 생계를 유지하며 운동을 했습니다. 쇠파이프 양 끝에 시멘트를 붙여 놓고 무작정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죠. 지금 생각하면 아주 비과학적인 훈련이었어요.(웃음)”

 운동을 시작한 뒤 그는 부산 지역의 장애인체육 기반이 열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비장애인의 ‘인솔’로 장애인 대회에 참여하는 게 전부인 시절이었다. 이 당선자는 “후배 한 명이 뭔가 해 보자고 건의했다. 그때부터 부산시청과 관련 기관들을 돌아다니며 장애인체육 조직의 필요성을 얘기했다”고 기억했다.

 노력은 결실을 맺어 1995년 부산에 국내 최초로 시 장애인체육회가 만들어졌다.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그는 사무국장을 맡아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장애인체육회가 출범한 직후 경력직으로 입사한 그는 생활체육부, 전문체육부, 시설운영부 등을 두루 거치며 경험을 쌓았고 비장애인 선수들의 태릉선수촌 격인 이천훈련원 원장도 지냈다.

 “장애인에게 스포츠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95%의 후천적 장애인을 포함해 모든 장애인의 목표는 재활을 통해 사회에 성공적으로 복귀하는 것이죠. 확고한 목표를 추구하는 스포츠와 재활을 접목하면 확실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래야 수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닌 경쟁력을 갖춘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어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국회의원(1, 2대)과 공군참모총장 출신인 제3대 김성일 회장에 이어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 장애인체육회를 이끌게 된 이 당선자는 23일 취임식부터 4년 임기를 시작한다.

이천=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장애인체육회#이명호#장애인체육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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