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1) ‘도루왕 제조기’ NC 김평호 주루코치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11월 30일 05시 30분


‘코치, 그들을 말한다’의 첫 번째 주인공은 NC 김평호 신임코치다. 주루방면에 능통해 ‘도루왕 제조기’로 불리는 김 코치는 새 팀 NC에서 다시금 노하우를 전파하겠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사진제공 | NC
‘코치, 그들을 말한다’의 첫 번째 주인공은 NC 김평호 신임코치다. 주루방면에 능통해 ‘도루왕 제조기’로 불리는 김 코치는 새 팀 NC에서 다시금 노하우를 전파하겠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사진제공 | NC
훌륭한 선수 뒤에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 선수보다 먼저 운동장에 나와, 선수만큼 많은 구슬땀을 흘리는 조력자들, 바로 코치들이다. 그들도 한때는 선수였다. 지금은 한 발 뒤에서 선수들을 위해 묵묵히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아왔다. 스포츠동아는 선수들의 실수에 더 마음 졸이고, 선수들의 성공에 더 기뻐하는 코치들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코치, 그들을 말한다’의 첫 번째 주인공은 ‘도루왕 제조기’로 통하는 NC 김평호 주루코치다.

김평호 코치는 도루왕 제조기다. 1996년 OB(두산 전신)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정수근(OB→두산·1998년~2001년·4회), 이용규(KIA·2012·1회), 김상수(삼성·2014·1회), 박해민(삼성·2015~2016·2회) 등 도루왕을 8번이나 배출했다. 2017시즌부터는 박민우 김종호 나성범 김성욱 등 기동력을 갖추고 있는 NC에서 어떤 마법을 보여줄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는 “NC는 지금까지 전준호 코치가 워낙 선수들을 잘 지도해서 나는 숟가락만 올린다는 생각”이라며 웃고는 “지금까지 마련된 발판에서 내가 가진 장점을 더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 달리기 잘 하던 시골촌놈의 파란만장 야구 입문기

김 코치는 땅 끝 마을 전라남도 해남 출신이다. 달리기는 동네 대표를 할 정도로 잘 했지만 프로야구와는 사실 거리가 먼 시골소년이었다. 야구라고 해봤자 비료포대로 만든 글러브와 빨래방망이로 공을 치고 잡는 게 전부였을 정도. 그랬던 그가 ‘진짜야구’를 접한 건 광주 학강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면서였다. “야구부 유니폼 입은 친구들의 모습에 한 눈에 반했다”는 김 코치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 간 뒤 야구에 입문했다. 마침 전학을 간 시골학교에 야구부가 창단했고, 당시 야구부 코치가 친구와 함께 기웃거리던 김 코치를 영입한 것이다. 그는 “야구를 하면 글러브, 유니폼이 있어야하는데 여의치 않은 집안형편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야구부 코치님이 우리가 운동 잘 한다는 얘기를 들으셨는지 ‘용품은 다 제공해줄 테니까 야구 한 번 해볼래?’라고 제안을 하시더라. 야구부에 들어가자마자 내 친구는 투수를, 나는 유격수를 했는데 팀에 기둥이 됐다”고 설명했다.

● 초등학교 때부터 스카우트돼 야구 꿈 이어가

운동센스를 타고났던 김 코치와 친구는 이후 승승장구했다. 학교 야구부가 창단한 지 2~3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둘의 활약 덕분에 소년체전 출전권이 달린 전라북도 대표 선발대회에서 결승까지 올라갔다. 비록 군산초와의 결승에서 0-1로 패했지만 김 코치와 친구의 모습을 눈여겨봐둔 군산초 야구부장과 교감선생님이 이들을 섭외하면서 야구의 꿈을 이어가게 됐다. 그는 “당시 6학년이었는데 5학년으로 속이고 대회에 출전했던 터라 군산초로 전학 간 이후에도 5학년부터 다시 수업을 들었다”며 웃고는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가능했다. 익산에서는 야구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군산초로 가게 되면서 군산남중, 군산상고, 동국대까지 야구를 했다”고 말했다.

물론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김 코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하숙생활을 해야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게 힘들었지만 집에 크게 도움을 받지 않고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려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NC 김평호 코치. 사진제공|NC 다이노스
NC 김평호 코치. 사진제공|NC 다이노스

●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기에 시작했던 야구공부

김 코치는 동국대 졸업 후 김정수 장채근 차동철 이건열 등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해태에 지명됐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졸업 후 프로 대신 실업팀에 가고 싶었지만 당시 대학교 야구부 감독이던 김인식 현 WBC 국가대표 감독의 권유로 해태에 입단했다. 그러나 프로에서 그의 역할은 대수비, 대주자가 전부였다. 1990년 쌍방울로 이적한 뒤에도 2군에 머물렀다. 김 코치가 풀타임 주전으로 뛴 것은 1991년과 1992년 2년뿐이었다. 결국 1992시즌이 끝난 뒤 그는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김 코치는 1996년 OB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전주에서 리틀야구단을 운영했고, 방송활동도 했다. 1994년부터 전면드래프트제도가 도입되면서 해태 스카우트 담당으로 프런트 생활도 해봤다. 당시 장성호 등을 영입하며 스카우트로서도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일을 그만두게 됐다. 야인이 된 김 코치를 다시 야구계로 부른 건 김인식 감독이었다. 그는 “감독님과는 대학에서 4년, 해태에서 4년, 쌍방울 4년, OB와 두산에서 8년 등 20년을 같은 유니폼을 입고 생활했다”며 “감독님께서 나에게 많은 부분을 믿고 맡겨주셨는데 정작 내가 아는 게 많지 않더라. 난 그렇게 유명했던 선수도 아니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야구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 스스로 전력분석 자료 만들었던 부지런한 코치

지금이야 전력분석의 중요성을 다 알지만 1990년대만 해도 제대로 된 시스템조차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결국 김 코치는 직접 비디오카메라로 선수들의 영상을 찍고, 수작업으로 여러 가지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1000만원이 넘는 사비를 털어 전력 분석 장비를 구입하며 자료를 만들었다.

자신만의 전력분석 자료를 만드는 건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매일 열리는 5경기를 녹화해 훈련 시작 3~4시간 전부터 운동장에 나가 전 구단 선수들의 플레이를 일일이 체크하는 게 하루일과의 시작이다. 일이 너무 방대해져 가끔 너무 힘들 때도 많지만 그렇게 해야만 직성에 풀리는 성격이라 어쩔 수 없이 모든 자료를 직접 관리하고 있다.

그렇게 쌓인 자료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큰 힘이 되고 있다. 도루왕 제조기 타이틀도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NC 김경문 감독도 김 코치의 능력을 알기에 그의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김 코치는 “NC에 와서 느낀 점은 선수들이 정말 활기차고 의욕이 넘친다는 점이었다”며 “기동력은 말할 것도 없다. 전준호 코치가 너무나 잘 만들었기 때문에 기대감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코치생활을 하면서 기술적인 부분도 있지만 선수들에게 마음으로 힘을 주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며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코치생활을 해왔고, 문을 열어놓고 선수를 기다리기보다 선수의 방문을 먼저 두드리며 살아왔다. NC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에게 힘이 되는 코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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