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의 외야석] 왜 ‘한대화 감독’은 재평가가 되고 있을까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6월 29일 05시 45분


한대화 전 감독이 지휘하던 2010년, 한화의 연봉총액은 28억2000만원으로 당시 페이롤 1위 SK(58억1300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부족한 지원에도 꿋꿋이 팀의 재건에 힘썼던 그에 대한 재평가가 최근 이뤄지고 있다. 스포츠동아DB
한대화 전 감독이 지휘하던 2010년, 한화의 연봉총액은 28억2000만원으로 당시 페이롤 1위 SK(58억1300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부족한 지원에도 꿋꿋이 팀의 재건에 힘썼던 그에 대한 재평가가 최근 이뤄지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야왕’이라 불리던 전 한화감독 한대화, 경기감독관으로 본 KBO리그

한대화 전 한화 감독 인터뷰

2010년 구단 연봉총액 28억원의 한화 사령탑
장기적 시각 리빌딩 하다 경질됐지만 “후회없다”
감독관으로 한화 경기 보며 항상 응원 “잘됐으면”

한대화(56) 전 감독(현 KBO경기운영위원)에게 연락을 한 건 최근 야구팬들 사이에서 지도자로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선수시절 한 전 감독은 슈퍼스타였다. 해태에서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포함해 6회 정상에 올랐다. 1994년 LG에서는 여전히 트윈스의 마지막 우승으로 기록된 한국시리즈 우승 주역이었다. 골든글러브 8회 수상, 올스타전 11회 출장 등 빛나는 기록을 세웠고, 동국대학교 4학년 때 참가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기록한 끝내기 3점 홈런은 야구 역사에 영원히 남을 순간이었다.

지도자로도 감독이 되기 전까지는 순탄했다. 모교 동국대학교 감독(1998∼2003)을 거쳐 삼성에서 타격코치와 수석코치를 지내며 전성기를 함께했다.

2009년 시즌이 끝나고는 한화의 제8대 감독으로 선임됐다. 선수시절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고향 팀 유니폼을 입는 순간이었다. 지휘봉을 잡고선 2010년 8위, 2011년 6위를 기록했다. 2012년에는 성적 부진으로 8월 27일 중도 퇴진했고, 그 해 한화는 다시 최하위를 기록했다.

성적만 봤을 때는 참담했다. 그러나 그는 인기 감독이었다. 팬들은 선수시절 ‘해결사’로 불렸던 그에게 ‘야왕’이라는 근사한 별명도 지어줬다.

2010년 한화는 연봉총액이 28억2000만원으로 당시 페이롤 1위 SK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김태균과 이범호가 일본으로 떠났고, 주축 선수들이 대거 은퇴한 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구단은 높은 순위를 원했다. 그에 맞서 한 전 감독은 철저히 팀 재건에 초점을 맞추다 중도 퇴진했다. 재평가의 초점도 이 부분이다.

-KIA 수석코치에서 물러나 지난해부터 경기감독관을 맡고 있다. 직접 그라운드에서 한화 경기도 보고 있다. 어떤 마음이 드나.

“열심히 응원한다. 한화가 정말 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경기를 보고 있다. 최근에 성적이 좋지 않아 많이 안타까울 뿐이다. 애착이 크다. 감독이 된 팀 아닌가. 눈에 밟히는 선수들도 여전히 많다. 함께 호흡하며 웃으면서 운동했던 친구들인데 얼마나 애정이 크겠나. 3년여 함께 하면서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참 즐겁게 야구했다. 선수들 한 명 한명이 커가는 모습도 봤고 추억이 많이 있다.”

-당시 한화는 연봉 총액이 지금 한화 선수 서너 명이 받는 액수보다 적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실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감독이 되자마자 우선 군대를 계속 보냈다. 1∼2년으로 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길게 보려고 했다. 물론 구단이 얼마나 기다려 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토종 선발을 빨리 키워야 하는 것이 첫 번째 숙제로 봤다. 또 선수들이 많이 빠져나가서 타선도 그렇지만 수비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 부분도 굉장히 강조하며 열심히 하자고 했었다. 투수를 잘 키우고, 군복무를 마치고 야수들이 돌아오고, 신인들도 쑥쑥 성장을 하면 몇 년 후 좋은 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욕심이 없었냐고? 당연히 매일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욕심을 부렸으면 (류)현진이도 막 굴리고 했겠지만 그게 정답이 아니라고 봤다.”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감독은 현역시절처럼 변함없는 스타였다. 사실 취재진들 사이에서도 한화 덕아웃은 항상 웃음이 넘쳐 인기가 높았다.

“감사할 뿐이다.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아서 죄송했다. 경기 전에 취재진과 브리핑할 때는 팀은 어려워도 조금이라도 더 밝게 만나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자들과 함께 할 때 많이 웃고 막상 경기에 들어가면 잘 웃지 못했다. 많이 지는 바람에…. 경기 때도 그렇게 웃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워낙 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감독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것 같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다면 ‘해결사’라는 별명답게 화끈한 선 굵은 야구를 보여주기를 바라는 팬들이 많다.

“글쎄, 생각이 조금 다르다. 물론 개인적으로 매우 공격적이고 화끈한 야구를 좋아한다. 단, 감독으로 경력은 매우 미천한 사람이지만 절대 감독이 자기 야구를 팀에 투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팀에 맞춰 그 팀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야구, 특히 팀 상황에 맞는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당시 한화는 토종 선발을 키우고 수비력과 기동력을 향상 시켜야 했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기회가 또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팀이 감독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팀에 맞춰야 한다.”

-경기 감독관으로 야구를 보고 있다. 어떤 느낌인가.

“양 쪽 덕아웃을 번갈아 볼 수 있는 자리다. 그 전에는 한쪽에서 그라운드를 바라봤다면 이제 전체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감독관은 비가 내릴 때만 경기 시작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로 알고 있다. 별로 바빠 보이지 않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경기를 보면서 심판들에 대한 보고서도 쓰고 채점 비슷한 것도 해야 한다. 열심히 야구 보면서 공부하고 있다.”

한대화 전 감독은 인터뷰 전 주제를 듣고 “오래전에 팀을 떠난 사람인데 혹시라도 누가 되거나 오해가 있으면 안 된다”고 몇 차례 강조했다. 그리고 한화에 대한 말이 나올 때 마다 특유의 말투로 “성적이 초반에 안 좋으니까 안타깝지 안타까워”, “진짜 잘 됐으면 좋겠어. 선수도 팀도 다”라고 연이어 말했다. 2009∼2011년에 ‘해결사’는 한화의 성적을 해결하지 못했다. ‘야구의 왕’이라고 불렸지만 진짜 왕은 되지 못했다. 그래도 그에게는 팀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큰 헌신이 있었다. 비록 그것 때문에 단명했을지라도.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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