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욱, 한국선 ‘느림보 골퍼’… 미국선 ‘나이스 가이’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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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사고 전문골퍼?… 나상욱 형제가 말하는 뒷얘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뛰고 있는 나상욱(오른쪽)에게 세 살 위의 친형 상현 씨는 정신적인 지주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이들 형제는 주니어 시절에는 함께 골프 선수로 활동했다. 이후 형 상현 씨는 진로를 학업으로 돌려 현재 경희대 골프산업학과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두 형제가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뛰고 있는 나상욱(오른쪽)에게 세 살 위의 친형 상현 씨는 정신적인 지주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이들 형제는 주니어 시절에는 함께 골프 선수로 활동했다. 이후 형 상현 씨는 진로를 학업으로 돌려 현재 경희대 골프산업학과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두 형제가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8일 서울 송파구의 한 찻집에서 만난 재미교포 골퍼 나상욱(29·타이틀리스트)은 걸음도 빨랐고 말도 빨랐다. 질문을 던지기가 무섭게 속사포같이 답변을 쏟아냈다. 마음에 쌓인 것도 할 말도 많은 듯했다.

10년 가까이 세계 최고의 무대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뛰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이지만 지난 2년간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지난해 생애 첫 우승의 감격을 맛본 기쁨도 잠시. 늑장 플레이의 대명사로 찍혀 언론과 팬들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나상욱은 각종 ‘대형사고’ 속에 감춰져 있던 뒷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경희대 골프산업학과 객원교수이자 한국체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세 살 위의 형 나상현 씨(32)가 자리를 함께했다.

○ “방아쇠를 당겨라” 조롱 섞인 야유

올해 5월 열린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을 통해 골프팬들은 ‘왜글(Waggle·어드레스 때 손목 긴장을 푸는 동작)’이라는 낯선 용어에 익숙해졌다. 나상욱이 숱하게 왜글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제5의 메이저대회라 불리는 이 대회에서 나상욱은 3라운드까지 1타 차 단독 선두를 달렸다. 하지만 이 왜글 때문에 사달이 났다. 한 홀에서 왜글을 24번이나 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마지막 4라운드에서 갤러리들이 대놓고 나상욱을 조롱한 것이다. 이날 나상욱은 거의 모든 홀에서 “빨리 쳐라” “방아쇠를 당겨라” 등 조롱 섞인 야유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4타를 잃고 공동 7위로 떨어졌다.

여기까지가 한국에 소개된 내용이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은 곧이어 일어났다. 나상욱은 갤러리들의 비난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조금이라도 경기 시간을 줄이기 위해 페어웨이를 뛰어다녔고, 경기 후 자신의 볼과 장갑에 사인을 해 팬들에게 건넸다. 눈물을 글썽이며 우승자 맷 쿠차의 우승 소감을 경청하며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는 “갤러리의 야유가 무척 힘들었지만 모두 내 탓이다. 앞으로 왜글 시간을 줄이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솔직한 그의 모습에 비난 일색이던 여론이 우호적으로 돌아섰다. 뉴욕타임스는 이튿날 ‘심리적 불안이 그를 망쳤지만 그는 품위를 지켰다’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도대체 갤러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언제부터 골프가 훌리건들이 날뛰는 저급한 스포츠가 되었나’와 같은 내용의 기사와 칼럼이 다수의 매체에 실렸다. “평소 치던 대로 치라”는 메시지가 쇄도했고 팬들도 늘었다.

나상욱의 늑장 플레이는 입스(yips·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이 굳는 현상)에서 비롯됐다. 그는 “몇 해 전 스윙 교정을 하면서 입스가 왔다. 아예 백스윙 자체가 올라가지 않았다. 보는 사람도 답답했겠지만 나는 완전히 미칠 지경이었다. 당시 매 경기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지만 필드에 나가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완전한 내 스윙을 찾진 못했다”고 털어놨다.

○ 한 홀 16타 사건의 진실

아마추어 시절 각종 최연소 기록을 경신했던 나상욱은 ‘제2의 타이거 우즈’라는 평가를 들었던 선수다. 하지만 정작 그가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건 지난해 4월 열린 텍사스 발레로 오픈 1라운드 9번 홀에서 16타를 쳤을 때다.

공교롭게 당시 중계를 맡았던 골프 채널은 그에게 단독 카메라를 붙이고 마이크까지 부착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PGA 프로가 한 홀에서 16타를 치는 희귀한 장면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그날부터 일주일간 골프채널과 ESPN은 연신 그 장면을 내보냈다. 우승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한 홀에 16타를 친 선수가 나상욱이라는 건 누구나 알았다.

그때도 나상욱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남은 9개 홀에서는 3언더파를 쳤다. 비록 컷오프를 당했지만 다음 날도 끝까지 경기에 임했다. 나상욱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창피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팬이 많이 늘었다. ‘프로도 저런 플레이를 하는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끼는 팬들이 많았던 것 같다”고 했다.

주최 측은 “우리 대회를 빛내줘서 고맙다”며 상품권을 보내왔다. 팀 핀첨 PGA투어 커미셔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스포츠맨십을 보여준 점을 칭찬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우승 복 없던 선수에서 전국구 스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 케빈 나보다는 나상욱이다

20년전 형제 모습 초등학생 시절 가족 여행을 하던 중 함께 촬영한 나상현(왼쪽)-상욱 형제. 그 당시의 얼굴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나상현 씨 제공
20년전 형제 모습 초등학생 시절 가족 여행을 하던 중 함께 촬영한 나상현(왼쪽)-상욱 형제. 그 당시의 얼굴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나상현 씨 제공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간 나상욱은 미국 시민권자다. 하지만 나상욱 자신은 스스로를 한국 사람으로 생각한다. 영어식 이름인 케빈 나보다는 나상욱으로 불리고 싶어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PGA 투어에 진출했을 때 백인 선수들로부터 무시를 많이 당했다. 당시 최경주 프로님께 한번 상의를 드렸더니 최 프로님은 ‘나는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괜찮아’라며 웃어넘기시더라. 그래서인지 요즘 PGA로 오는 한국 선수들을 더 챙기려고 한다”고 말했다. 노승열이나 강성훈 등 젊은 선수들을 식당에도 데려가고, 대회 전 연습 라운딩 때는 같이 코스를 돌며 설명을 해 주기도 한다.

나상욱의 한국 사랑을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 런던 올림픽 축구 한국과 잉글랜드의 8강전이 열릴 당시 나상욱은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열린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에 참가하고 있었다. 승부차기 끝에 한국이 잉글랜드에 승리하자 나상욱은 환호하며 온 호텔을 돌아다녔다. 이튿날 아침 당시 세계 랭킹 1위이던 잉글랜드 출신 골퍼 루크 도널드와 마주친 나상욱은 이렇게 말했다. “어제 경기 봤어? 완전 멋진 게임이었어.” 도널드는 그냥 웃기만 했다고 한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골프#나상욱#나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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