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런던 올림픽]숨죽이고 맘졸이고 잠설쳐도 신명났다, 대∼한민국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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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런던 드라마 17부

태극기를 처음 들고 밟은 올림픽 무대. 1948년 그곳은 런던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안 되는 가난한 나라 한국은 2000만 국민의 성원 속에 동메달 2개를 얻으며 59개 참가국 가운데 공동 32위에 올랐다. 64년 뒤 다시 런던.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의 경제 강국 한국은 5000만 국민의 응원 속에 종합 5위라는 원정 올림픽 최고 성적을 거뒀다. 열정과 노력, 좌절과 희망, 감동과 환희…. 드라마보다 재미있고 폭염보다 뜨거웠던 17일간의 런던 올림픽을 돌아본다.

○ 17일간의 열전, 시작은 오심으로

7월 28일(한국 시간) 한국의 아침은 올림픽 성화가 타오르며 시작됐다. 전국이 화창했던 이날 오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런던에서 전해졌다. 대회 2연패를 노리는 박태환(23·SK텔레콤)이 수영 남자 자유형 400m 예선에서 실격 처리됐다는 것이다. 박태환이 누구인가. 4년 전 베이징 올림픽 이 종목에서 한국 수영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건 한국 스포츠의 아이콘 아니던가. 다행히 4시간 뒤 박태환의 실격은 철회됐다. 오심이 인정됐다. 하지만 실격 통보에 큰 충격을 받은 박태환이 제 기량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았다. 박태환은 결선에서 라이벌 쑨양(중국)에게 뒤져 은메달을 땄다. 실격당했다는 소식에도 여유를 보였던 그는 “실격 소동을 결과와 연결하고 싶지는 않다”며 애써 의연한 척했지만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유도 남자 66kg급 조준호(24·한국마사회)는 황당한 판정 번복에 할 말을 잃었다. 29일 열린 8강에서 에비누마 마사시(일본)를 상대로 연장 접전 끝에 심판 3명의 전원 일치 판정승을 거뒀지만 승패는 이내 뒤바뀌었다. 유도 경기장을 웃음거리로 만든 ‘청기 백기 소동’이었다. 패자부활전을 통해 동메달을 거머쥔 조준호는 “판정은 심판의 몫이다. 결과에 승복한다”며 웃음으로 대회를 마쳤다.

31일 아침 국민은 신아람(26·계룡시청)의 경기를 보며 분노했다. 신아람은 여자 에페 준결승 연장에서 종료 1초를 남기고 상대의 공격을 3차례나 막았지만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대로 끝났다면 결승에 진출했을 상황이었지만 독일의 브리타 하이데만은 시간이 멈춘 틈을 타 득점에 성공하며 신아람을 울렸다.

○ 총·활·검 ‘최종병기 3총사’의 선전

잇단 오심 파동 속에서도 태극전사들은 4년간 흘렸던 땀을 차근차근 보상받았다. 한국의 첫 금메달은 사격 진종오(33·KT)의 총구에서 나왔다. 7월 29일 남자 10m 공기권총에서 무난하게 금빛 총성을 울렸다. 그는 5일 50m 권총에서도 정상에 오르며 대회 2관왕 및 개인종목 첫 2연패를 달성했다. ‘4차원 소녀’ 김장미(20·부산시청)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5m 권총에서 우승하며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여갑순 이후 20년 만에 여자 사격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2008년 베이징 대회까지 금 16개를 포함해 30개의 메달을 땄던 ‘효자 종목’ 양궁은 이번에도 효자였다. 대표팀 맏형 오진혁(31·현대제철)은 올림픽 사상 첫 남자 개인전 우승의 역사를 썼다. 기보배(24·광주시청)는 여자 양궁 단체전에 이어 개인전에서도 정상에 오르며 2관왕이 됐다. 연인인 두 사람은 런던에서 ‘금메달 커플’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예상치 못했던 수확은 펜싱에서 나왔다. 김지연(24·익산시청)이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한국 여자 펜싱 사상 첫 금메달을 땄고 펜싱 남자 대표팀도 최초로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금 2개, 동 3개로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대회 초반 ‘신아람 오심’의 아쉬움과 분노를 단칼에 날려 버린 쾌거였다.

총·활·칼 ‘최종병기 3총사’가 대회 중반까지 올림픽을 이끌었다면 후반부는 ‘축구의 시간’이었다. 한국은 8강에서 축구 종가 영국을 꺾은 데 이어 3∼4위전에선 일본을 2-0으로 격파하고 올림픽 사상 첫 메달을 따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 부상 가난 나이…넘지 못할 것은 없다

기대했던 왕기춘(24·한국마사회)의 노메달로 실의에 잠겼던 유도는 김재범(27·한국마사회)이 1일 남자 81kg급에서 우승하면서 웃음을 찾았다. 김재범은 왼 어깨와 무릎 등 몸의 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진통제를 맞으며 사즉필생(死則必生·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다)을 보여 줬다. 오른 엄지 골절을 숨기고 출전을 강행한 김현우(24·삼성생명)는 경기 중 상대와의 충돌로 오른 눈이 퉁퉁 부어오른 채 그레코로만형 66kg급 결승에서 투혼을 발휘해 한국 레슬링에 8년 만에 금메달을 선물했다.

남자 90kg급 송대남(33·남양주시청)은 유도에선 환갑의 나이에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금빛 메치기에 성공했다. 실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올림픽을 앞두고 잇단 불운에 울었던 그는 “깜짝 금메달은 아니었다”는 말을 남기며 기분 좋게 한을 풀었다. 동서 사이인 유도 대표팀 정훈 감독과의 맞절은 지구촌의 화제가 된 세리머니였다.

가난도 올림픽 메달을 향한 집념에는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비닐하우스에 사는 부모에게 집을 선물하겠다던 효자 양학선(20·한국체대)은 남자 기계체조 뜀틀에서 자신만의 기술 ‘양1’을 성공한 덕분에 금메달과 아파트를 한꺼번에 얻었다.

○ 금빛보다 빛난 투혼

정상에 오르면 내려오기 마련이다. 피할 수 없는 길이다. 한국 역도의 간판 장미란(29·고양시청)도 그랬다. 하지만 75kg 이상급에 출전해 최선을 다했다. 메달은 못 땄지만 아름다운 4위로 국민을 울렸다. 역도 사재혁(27·강원도청)도 경기 중 팔을 다쳐 쓰러진 탓에 올림픽 2연패의 꿈을 날렸지만 포기하지 않은 열정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세계랭킹 15위 여자 배구는 동메달 결정전에서 숙적 일본에 졌지만 36년 만의 4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8개 대회 연속 4강에 오른 여자 핸드볼도 동메달 결정전에서 덴마크에 아쉽게 패했다. 그들은 마지막에 활짝 웃진 못했지만 금빛보다 더 빛나는 투혼과 열정을 보여줬다.

성화는 꺼졌다. 태극전사 245명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보낸 불면의 밤은 불멸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4년 뒤 열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오늘은 그 남은 4년의 첫날이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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