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최동원·장효조…웰컴! 700만 관중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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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9일 07시 00분


故 최동원(왼쪽), 故 장효조. 스포츠동아DB
故 최동원(왼쪽), 故 장효조. 스포츠동아DB
이닝으로 본 2011 프로야구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1회부터 9회 그리고 연장까지 그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인생에 3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듯 8위팀이 1위와 경기를 해도 3번 정도는 꼭 찬스가 온다. 2011년 프로야구도 마치 한편의 인생 드라마를 보듯 감동과 눈물, 애환이 함께 했다. 최동원, 장효조라는 큰 별이 하늘로 떠나는 아픔도 있었고 김성근 전 감독이 구단과 갈등 끝에 시즌 도중 옷을 벗었다. 그러나 마지막은 680만 9965명의 관중 신기록이라는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막을 내렸다. 2011년 프로야구를 1회부터 9회, 그리고 연장 10회로 나눠 정리했다.
1 inning
9구단 NC 창단…한국프로야구 9번째 심장 박동


3월 22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사회는 NC의 제9구단 창단을 심의했고 같은 달 29일 총회가 이를 승인했다. NC의 탄생은 프로야구가 지난 30년을 발판으로 앞으로 30년 새로운 도약을 위한 첫 발걸음이다. 특히 NC의 창단 과정은 프로야구구단의 가치와 위상의 새로운 정립이라는 긍정적 효과도 가져왔다.

NC는 게임기업 엔씨소프트의 프로야구에 대한 애착과 통합 창원시의 적극적인 지원이 창단에 가장 큰 힘이었다. 프로야구가 대기업의 홍보수단을 넘어서 지역 통합 및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모델을 보여준 성과였다. NC는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두산에서 물러난 김경문 감독을 초대사령탑으로 영입했다.
2 inning
감독 세대교체…류중일·이만수·양승호 초보감독 돌풍

김경문 전 두산 감독은 시즌 도중 팀성적 부진과 불미스러운 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임태훈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했다. 조범현 전 KIA 감독도 준플레이오프 탈락 이후 역시 유니폼을 벗었다. 김성근 전 SK 감독은 재계약과 관련한 예우 문제로 구단과 첨예하게 맞서다 ‘이번 시즌까지만 감독을 하겠다’는 폭탄 발언으로 결국 경질됐다. 원로 및 중견 감독이 물러나는 사이 초보감독들은 돌풍을 일으켰다. 삼성 류중일 감독(맨위쪽)은 안정적으로 팀을 이끌어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그리고 아시아시리즈까지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양승호 롯데 감독(맨 아래)은 시즌 초반 성적 부진으로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아 최종 3위로 성공적 데뷔시즌을 치렀다. 김성근 감독의 경질로 갑작스럽게 감독대행이 된 이만수 SK 감독(가운데)은 준플레이오프에서 KIA에 승리를 거뒀고 최종 한국시리즈까지 팀을 끌어올렸다. 김성근 감독이 물러나는 과정에서 일부 SK 팬들은 구장에 난입하고 기물을 파손하는 오점을 남겼다. 시즌 초반 1위까지 올랐던 LG 역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해 팬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고 박종훈 감독이 시즌 후 옷을 벗었다. 감독이 물러난 LG와 두산은 초보인 김기태, 김진욱 감독을 택해 감독 세대교체 바람이 계속됐다. 반면 그동안 해태색 지우기에 전념했던 KIA는 선동열 감독을 영입해 지역 팬 끌어안기에 나섰다.
3 inning
한국야구 투·타 전설 최동원·장효조 암으로 별세

9월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2명이 하늘로 떠났다. 한국시리즈 개인 4승 기록을 갖고 있는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왼쪽)은 대장암으로 하늘로 떠났다.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은 위암으로 눈을 감았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최고의 투수와 타자의 갑작스러운 별세에 많은 팬들이 큰 슬픔을 보였고 모든 야구인들은 한 마음으로 애도했다. 그동안 최 전 감독과 편하지 않은 관계였던 롯데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고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4 inning
오승환 최소경기 통산 200세이브 세계신 ‘역사를 쓰다’

8월 12일 대구구장에서 삼성 오승환은 세계야구기록에 남을 새 역사를 던졌다. 이날 세이브에 성공해 334경기 만에 통산 200세이브를 달성했다. 일본 기록 사사키 가즈히로(요코하마)의 370경기, 메이저리그 조나단 파펠본(보스턴)의 359경기를 뛰어넘는 세계 최소경기 200세이브 기록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해 세계 최연소 200세이브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한국프로야구에서는 만 29세 28일로 종전 구대성의 37세 11개월 12일을 크게 앞당겼다.
5 inning
FA 이대호 최대 111억…오릭스와 초대형 계약 잭팟

롯데에서 FA자격을 획득한 이대호의 선택은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였다. 이대호는 12월 6일 부산에서 입단식을 열고 2년간 계약금 2억엔, 연봉 2억 5000만엔, 그리고 인센티브 최대 6000만엔 등 총액 7억 6000만엔에 사인했다.(사진) 최대 약 111억원의 대형 계약으로 그동안 한국프로야구 선수의 일본 진출 첫 번째 계약으로는 사상 최대다.
6 inning
국민타자 이승엽·한화 거포 김태균 국내무대 컴백

이대호가 일본으로 떠났지만 해외에서 뛰던 스타들이 대거 한국으로 돌아왔다. ‘국민타자’로 불리는 이승엽은 오릭스를 떠나 친정 삼성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보낸 8년은 절반의 성공, 특히 마지막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 국내 복귀를 택했다.
2010년 지바 롯데에서 성공적으로 첫 발을 내디딘 김태균은 2년 만에 돌연 한국으로 돌아왔다. 외국인선수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고 팀 내에서 화합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잔여 연봉을 포기한 결단이었지만 계약기간,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일본내 여론은 차가웠다. 그러나 한화는 모그룹의 결단에 따라 김태균에게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대인 연봉 15억원을 안겼다.
7 inning
넥센 이택근 50억 FA 대박…조인성·정대현 등 FA 지각변동

대학을 졸업하고 병역을 필한 선수에 한해 FA자격 취득을 9년에서 8년으로 단축하며 역대 최대규모 FA시장이 열렸다. 11월 8일 프리에인전트(FA)신청 마감일 KBO에 도착한 신청서는 총 17장. 1999년 FA제도 도입 이후 가장 많은 숫자였다. 처음으로 16명을 넘어서며 각 구단은 최대 3명까지 FA영입이 가능했다. 그동안 FA와는 거리가 멀었던 넥센은 4년간 총액 50억원이라는 역대 2번째 규모 대형 계약으로 이택근을 붙잡았다. 2년전 현금트레이드로 LG에 이택근을 떠나보내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FA가 되자마자 이택근을 다시 품에 안았다. 이 밖에 SK는 롯데에서 임경완과 LG에서 조인성을, 롯데는 반대로 SK에서 이승호와 정대현을 영입하며 불펜을 크게 보강했다. 한화는 LG가 시즌 도중 박병호와 심수창을 내주고 데려온 송신영을 영입했다.
8 inning
투수 4관왕 윤석민 논스톱 ML 도전, KIA 만류로 제동

다승, 방어율, 탈삼진, 승률까지 투수 트리플크라운 등 4관왕에 오르며 페넌트레이스 최우수선수(MVP)가 된 윤석민은 공개입찰을 통한 해외진출이 가능한지를 소속팀 KIA에 문의했다.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지만 더 큰 성적을 위해 감독까지 교체한 KIA는 윤석민이 가장 필요한 핵심 전력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윤석민도 구단의 결정을 받아들여 FA자격을 얻는 2년 후로 메이저리그 도전을 미뤘다.
윤석민이 꿈을 접을 때 SK에서 FA가 된 정대현이 조용히 메이저리그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성공하면 한국에서 미국으로 첫 직행이라는 의미있는 기록이 될 수 있었다. 계약진행도 발표대로라면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볼티모어와 물밑 협상을 가진 정대현은 11월 18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2년간 최대 320만 달러의 계약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정대현은 12월 7일 아무런 발표 없이 귀국했다. 정대현은 결국 12월13일 “메디컬 테스트에서 간 수치가 높게 나왔다”고 메이저리그행 불발을 공식 인정했고, 발빠르게 움직인 롯데와 4년 36억원에 계약했다.

박찬호. 스포츠동아DB
박찬호. 스포츠동아DB

9 inning
박찬호 최저연봉 계약 & 전액 기부 …0으로 모든 것을 얻다

2002년 박찬호는 텍사스와 5년 총액 755억3000만원의 대형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나 2011년 박찬호는 한화와 2400만원에 도장을 찍었다. 연봉이 가장 많았던 2005년 하루 일당 5940만원의 절반도 되지 않는 액수. 그러나 박찬호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명예를 안긴 최고의 계약이었다. 일본 오릭스에서 퇴단한 박찬호가 국내 복귀를 원하자 KBO와 각 구단이 머리를 맞대야했다. 결국 ‘특별법’이라는 이름으로 조건 없는 국내복귀가 결정됐다. 박찬호는 연봉을 백지위임했고, 한화는 박찬호를 위해 마련했던 연봉 4억원과 옵션 2억원을 모두 유소년 야구발전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박찬호는 프로야구선수가 되기 위한 최저연봉 2400만원도 내놓았다.
10 inning
프로야구 10번타자, 680만 관중시대 활짝

2011년 한국프로야구 마지막 만루홈런의 주인공은 10번타자 관중이었다. 올시즌은 유독 비로 취소되는 경기가 많았다. 그러나 개막 전 목표로 했던 600만 관중을 뛰어넘어 680만9965명의 관중을 달성했다.
대부분의 순위가 결정된 시즌 마지막까지 관중들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특히 여성과 가족단위 관중이 크게 늘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평균 총 관중수가 200만명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비약적인 발전이다. 올시즌 경기당 평균 관중은 1만2801명이었다. 대구와 광주, 목동, 대전이 1만5000명 이하의 소형 구장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트위터 @rushl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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