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베이스볼] 까치 범털 전어…가을이 되면 강해지는 ‘추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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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8일 07시 00분


박정권. 스포츠동아DB
박정권. 스포츠동아DB
■ 가을 레전드에게 듣는다…“PS만 되면 강해지는 비법”

큰 경기 수비 중시…조연급 깜짝 활약
김선진·전상열·김성갑 등 스타 부상

경기전 훈련보다 마인드컨트롤 집중
만원관중 앞 자신감…압박감도 즐겨


포스트시즌이 돌아왔다. 이 맘 때가 되면 가을 냄새를 맡고 피가 끓어오르는 선수들이 있다. ‘가을사나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각본 없는 드라마에 주인공은 반드시 스타급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사실. 정규시즌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던 조연급 선수가 툭 튀어나와 스타가 된다. 그래서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포스트시즌만 되면 강해지는 이유는 뭔가요?”

● ‘가을까치’ 김정수, ‘범털’ 김선진, ‘가을전어’ 전상열

포스트시즌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정수 현 KIA 2군 투수코치다. 그는 정규시즌에 도드라지는 선수가 아니었다. 해태에 몸담았던 10년간 시즌 10승을 넘긴 적은 1992년(14승8패)과 1993년(10승8패) 딱 2번뿐이었다. 그러나 프로 데뷔 첫 해인 1986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후대에 길이 남는 ‘가을까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3-3으로 맞선 한국시리즈 1차전 연장 10회 등판해 2이닝 1안타 4탈삼진 2볼넷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고, 3차전에서도 선발 이상윤의 바통을 이어 받아 5이닝 2실점하며 또 승을 따냈다. 5차전 역시 당시 삼성 에이스 김시진과 맞붙어 5이닝 2실점으로 3승. 신인 최초로 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고,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한국시리즈 통산 최다승(7승)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LG 김선진도 대표적인 가을사나이다. 1990년 팀 창단 첫해 우승 주역으로 급부상하며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1993년 해태 3루수 한대화(현 한화 감독)와 LG 1루수 김상훈의 대형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1루가 비게 됐을 때도 빈 자리의 주인은 그가 아닌 서용빈이었다. 당시 김선진의 별명은 모든 걸 잃었다는 의미의 ‘개털’이었다. 그러나 1994년 잠실에서 열린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 연장 11회말 좌월끝내기홈런을 때려내며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고 이후 LG는 내리 3연승하며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후 ‘개털’이라는 별명은 ‘범털’로 바뀌었다.

두산 전상열 현 원정전력분석원도 ‘가을전어’라고 불릴 만큼 큰 경기에 강했다. 19년간 그는 백업이었지만 50타수 이상을 기준으로 했을 때 포스트시즌 타격 5위(84타수 30안타로 PS 타율 0.357)에 랭크돼 있다. 2005년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3경기 동안 10타수 6안타 4타점을 올리며 MVP가 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포스트시즌 7회 이후 2점차 이내 상황 득점권 타율이 무려 0.471(17타수8안타)에 이를 정도로 큰 경기에서의 임팩트가 컸던 김성갑 현 넥센 수비코치, 2009년부터 새로운 가을사나이로 급부상한 SK 박정권(타율 0.409. 66타수 27안타·50타수 이상 기준 타격 2위), 1997년 삼성, 1999년 한화, 2000년 LG 등 각기 다른 유니폼을 입고 포스트시즌에서 펄펄 날았던 최익성, 한국시리즈 25.1이닝 무실점의 사나이 해태 문희수, ‘가을동화’ SK 조동화 등이 있다.

우리가 큰 경기에 강한 이유

큰 경기에 떨지 않는 강심장은 없다. 전설의 투수 선동열 전 삼성 감독은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당시 그로서는 대량실점이었던 3실점을 한 적이 있다. 김시진 현 넥센 감독도 현역 시절 페넌트레이스에서는 상대를 압도하는 특급에이스였지만 큰 경기에 유독 약한 비운의 투수였다. 그만큼 중압감이 크다는 얘기다. 스타급 선수들도 상황이 이럴진대 경기에 자주 출장하지 못했던 선수들의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되레 경기를 장악했다. 이유는 크게 2가지였다. 좋은 기억과 경기에 임하는 마음가짐이었다. 두산 임재철은 가을에 잘 할 수 있는 비결로 “신인 때 포스트시즌 첫 단추를 잘 꿴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롯데에 입단한 첫 해(1999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중요한 득점을 올렸다. 그는 “그때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큰 경기에서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임재철을 선발로 기용했던 김경문 현 NC 감독도 “큰 경기에서 선수들의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는 게 바로 좋은 기억이다. (임)재철이가 그동안 가을에 잘 했기 때문에 제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전 전력분석원은 경기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중시했다. 그는 “솔직히 큰 경기에 누가 안 떨리겠나.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긴장을 즐겼다. 상대팀 관중들이 부르는 노래에 박자도 맞추고 ‘그래 포스트시즌은 페넌트레이스 보너스 경기잖아’라고 자기 암시를 하며 경기 자체를 즐기려 했다”고 대답했다. 김성갑 현 넥센 수비코치는 “빙그레와 해태가 라이벌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중이 많았는데 오히려 그런 경기를 좋아했다”며 “큰 경기에서도 즐기는 편이었다. 오히려 타구가 나에게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게임에 나섰던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정규시즌에서는 타순이 7, 8번이었지만 포스트시즌에는 1, 2번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포스트시즌은 준비가 반이다

‘기회’도 한 몫 했다. 대부분의 가을사나이들은 투수를 제외하고 김성갑 임재철 조동화 전상열 등 전형적인 수비형 선수들이 많았다. 김 NC 감독은 “큰 경기는 공격력, 주력, 타력보다 수비력이 중요하다. 잘못된 수비 하나에 투수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감독들은 큰 경기에 수비형 선수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주로 벤치를 지키다 경기에 나가게 된 이들은 출장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한 타석, 공 하나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을 줄 알고 결과는 당연히 좋다. 전 전력분석원도 “수비가 더 강조되는 포스트시즌 특성상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게 아무래도 도움이 됐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진다고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재걸 현 삼성 작전코치는 “2001년 한국시리즈 직행이 결정되고 팀 합숙에 돌입했는데 잘 하려는 욕심에 과하게 훈련을 했던 게 독으로 작용했다”며 “잘 하려고 한 순간 몸이 경직되면서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것도 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때의 경험은 반면교사가 됐다. 그는 2002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몸 컨디션을 조절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훈련보다 마인드컨트롤과 몸상태 최적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결과는 대성공.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7-10로 LG에 뒤지던 8회말 최고의 마무리투수 이상훈을 상대로 대구구장 가운데 펜스를 맞히는 2루타를 날리면서 대역전극의 서막을 열었다. 2005년에는 크레이지모드였다. 한국시리즈 4차전 연장 10회 결승2타점적시타를 비롯해 12타수 6안타(타율 0.500) 4득점 2타점 5볼넷으로 맹활약했다. 비록 MVP 투표에서 오승환에게 영광을 양보해야 했지만 선수단은 숨은 영웅으로 그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PS도 장악한다

야구는 흔히 ‘멘탈게임’이라고 한다. 반복훈련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기술발현은 정신력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 세인트루이스의 최고 타자 마크 맥과이어는 1998년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최다홈런(70홈런)을 때려낼 수 있었던 비결로 멘탈 리허설을 꼽았다. 그는 시즌 70홈런을 기록하기 직전 방망이를 휘두르는 대신 눈을 감고 마음에 집중했다. 당시 나온 명언이 “사람들은 모두 내 육체를 보지만 두 팔보다는 마음을 더 사용한다”는 것. 스포츠심리학전문가인 체육과학연구원(KISS) 김용승 박사도 “불안수준이 높아지면 심박수가 올라가는데 이 때 적정수준의 상승은 신체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른바 사이키업(psyche-up) 상태다. “약간의 흥분이 경기에 대한 집중력을 높인다”는 선수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즉, 포스트시즌에서도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끝에는 웃을 수 있다는 얘기다.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트위터 @hong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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