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그 까짓것 가지고 항명? 원시인 소리 듣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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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23일 14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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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셀틱에서 뛰고 있는 기성용.
스코틀랜드 셀틱에서 뛰고 있는 기성용.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 기자들은 '원시인'이었다.

원시인? 똑똑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기자들이 원시인이라…. 그 이유는 이렇다.

서울올림픽 출전국이 159개국이었던 만큼 100여 개국에서 취재기자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이들이 치열한 취재 경쟁을 벌이는 경기장 취재석에서는 색다른 풍경이 연출됐다.

한국 기자들을 포함해 주로 아시아권 기자들은 종이에 펜으로 열심히 기사를 써서 팩스로 달려가 송고를 하는 반면, 미국이나 유럽 쪽 기자들은 도시락처럼 생긴 박스 형 물건을 꺼내 거기다 타자로 기사를 톡톡 친 뒤 전화선을 연결해 송고하거나 통신이 잘 안되면 프린트를 해서 팩스로 보내는 것이었다.

서구 기자들이 사용하던 이 물건은 바로 초기 형태의 노트북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필자는 안면을 익힌 한 벨기에 기자로부터 사용법 등을 들었는데,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1990년대부터 국내 언론사에도 이런 노트북이 본격 보급됐고, 우리나라의 반도체와 컴퓨터, IT 산업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지금은 기자들이 취재와 원고 작성 때 최첨단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요즘에야 초등학생들도 노트북을 쓰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지만, 서울올림픽 당시에 외국 기자들 눈에 한국 기자들은 '원시인'으로 보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스포츠 계에서도 지도자들은 노트북을 경기장에 들고 다니며 각종 자료를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선수단 관리를 하고, 선수들은 인터넷에 미니홈피 등을 만들어 팬과 직접 소통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미니홈피에 올린 선수들의 개인적인 글이 최근 파문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했던 축구대표팀 수비수 오재석(수원)과 골키퍼 김승규(울산)가 쏟아낸 야구대표팀 폄훼 글로 논란이 일었다.

당시 오재석은 미니홈피에 '눈앞에서 매일같이 햄버거에 피자에 콜라를 먹으면서 아주 간단하게 금메달 목에 걸고 가는 선수들도 있더라'는 글을 남겼다.

김승규는 '금메달? 경기 와서 피자? 햄버거? 콜라? 그냥 매끼마다 다 드시고 실력이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날 정도로 좋으셔서 결승전까지 쉽게~이기셔서 금메달 따 가신 분들 좋으시겠습니다? 그 금메달보단 저희 동메달이 좋네요'라는 글을 남겼다.

철저한 식이요법으로 경기를 준비하는 축구에 비해 입에 맞는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야구대표팀을 비아냥거린 이 글은 야구선수를 향한 시기와 질투로 해석돼 논란을 낳았다.

스코틀랜드리그 셀틱에서 뛰고 있는 기성용도 2007년 11월 베이징올림픽 예선 우즈베키스탄전에서 0-0으로 비긴 뒤 팬들의 비난이 쏟아지자 미니홈피에 "답답하면 너희들이 뛰던지…."라는 글을 남겨 파문을 일으켰다.

경솔하다는 팬들의 비난 글이 쏟아지자 기성용은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제15회 아시안컵에서 4강행을 확정지은 축구대표팀. 여기서도 최근 미니홈피 때문에 한차례의 작은 소동이 있었다.

미니홈피에 올린 글 때문에 작은 소동에 휩싸였던 유병수.
미니홈피에 올린 글 때문에 작은 소동에 휩싸였던 유병수.
신예 공격수로 대표팀에 발탁된 유병수(23·인천)가 호주전에서 교체 투입됐다 22분 만에 물러난 뒤 미니홈피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됐다.

"진짜 할 맛 안 난다. 90분도 아니고 20분 만에 내가 가지고 이룬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렸네…."

봐서는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으나 이에 대해 코칭스태프로부터 "박지성 이청용 등 전반부터 출전한 선수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열심히 뛰었다. 유병수는 자신이 왜 교체를 당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자 일부 언론에서는 유병수가 '항명'을 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파문이 커지자 유병수는 "저 자신한테 너무 화가 났고 감독님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는데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감독님께 항명한 적도 없습니다"라는 해명의 글을 올렸다.

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대표선수이긴 하지만 사적 공간인 미니홈피에 이 정도의 글은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이를 두고 '항명'이라고 몰아붙인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소셜미디어의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 이 정도 글을 항명이라고 못 박았다가는 정말 '원시인' 소리를 듣기 십상일 것 같다.

권순일기자 stt7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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