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또 터진 월드컵 전 ‘사고 징크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6일 10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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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2일. 칠레 앞바다에서는 지진 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리히터 규모 9.6이었다. 이 여파로 생긴 쓰나미가 칠레는 물론 미국 페루 하와이 사모아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과 일본 대만까지 덮쳐 7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 때는 칠레 월드컵이 열리기 2년 전. 칠레는 지진의 대 습격으로 처절한 국난을 당했지만 축구에 대해 열정이 대단했던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총력을 기울인 끝에 1962년 칠레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1930년 제 1회 우루과이 대회를 시작으로 80년의 역사를 맞고 있는 월드컵 축구대회는 개막 전에 큰 사건이 터져 대회 개최에 영향을 주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1년 앞두고는 멕시코 인접국에서 '축구 전쟁'이 벌어졌다. 북중미 지역예선에서 맞붙은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1969년 6월 12일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열린 2차전 경기에서 엘살바도르가 3-0으로 이기자 극도로 흥분한 양 팀 응원단 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원정 온 온두라스 응원단은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트럭에 실려 국경 밖으로 추방당했다. 같은 시각 온두라스에서는 좀 더 고약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온두라스 전역에서 자국에 살고 있던 엘살바도르 인들에 대한 보복 행위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던 것.

살인, 약탈, 방화로 온두라스의 주요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6월 23일 양국은 국교를 끊었다. 이런 와중에 양국 축구대표팀간의 최종전이 6월 27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렸고 연장전 끝에 엘살바도르가 이겼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 경기 후 16일 만에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간에 진짜 전쟁이 터진 것. 엘살바도르는 정규군을 앞세워, 온두라스는 낙하산부대를 위주로 유격전을 펼쳤으나 결국 온두라스가 2000 여 명이 훨씬 넘는 전사자를 내고 휴전을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축구로 인해 촉발된 '5일 전쟁'이다.

1974년 서독 월드컵을 앞두고 서독에서 열린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는 아랍계 '검은 9월단'의 이스라엘 선수단에 대한 테러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서독 정부는 군대까지 동원해 월드컵 대회를 치러야 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전 세계 국가들의 보이콧 의사로 대회 개최 자체가 불투명하기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1976년 군사혁명으로 군사혁명위원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강압적인 폭정과 잔혹한 인권 유린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때까지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암살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숫자가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게다가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약속하며 발족한 국가재건위원회의 지도자가 기자회견 도중에 암살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세계 여론이 보이콧 쪽으로 기울었다. 개최지가 네덜란드나 벨기에로 옮겨질지도 모른다는 소문 속에 국제축구연맹(FIFA)이 나서 간신히 중재를 한 끝에 대회가 열릴 수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1년 앞두고는 미국에서 이슬람 무장단체인 알 카에다가 납치한 여객기 4대로 9·11 테러를 일으켜 수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때문에 분단국인 한국에서 과연 안전하게 월드컵이 치러질 수 있을지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6월 11일 개막하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개막을 불과 두 달여 앞두고 잠잠했던 흑백 인종 갈등이 악화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극우 백인우월주의 조직이 월드컵 출전국에게 불참을 촉구하는 사건이 터졌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아프리카너(네덜란드계 토착백인) 저항운동(AWB)'의 앙드레 비사기 사무총장은 조직의 지도자였던 외젠테르 블랑슈가 전날 흑인 농장 인부 2명에 의해 피살된 것과 관련, "월드컵 본선 진출국에게 자국 대표팀을 보호하기 위한 충분한 안전장치가 없는 한 '살육의 땅'이 된 남아공에 보내지 말 것을 경고한다"고 말했다는 것.

비사기 사무총장의 불참 촉구 발언에 대해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강력히 비난하며 "AWB는 남아공의 애국적인 국민들처럼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협력해야만 한다"고 촉구했다.

하지만 하루 평균 50.6건의 살인과 502건의 강도 사건이 발생해 극도의 치안 불안 상태를 보이고 있는 남아공.

이런 남아공에서, 그것도 총인구 4500만 명 중 10%밖에 안 되지만 국가 경제권을 틀어쥐고 있는 백인의 우월주의 조직이 보낸 경고라는 점에서 이번 일이 그저 월드컵 개최 전에 의례적으로 한번 씩 터지는 '사건 징크스'의 하나로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권순일기자 stt7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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