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투혼’… 스위스전 끝으로 대표팀 은퇴 최진철

  • 동아일보
  • 입력 2006년 6월 27일 03시 00분



그의 피는 뜨거웠다. 그의 가슴은 더 뜨거웠다. 머리가 깨져도, 다리가 후들거려도 그의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모두가 숨죽인 순간. 상대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뛰어오르자 그도 반사적으로 같이 솟구쳤다. 충돌. 그러나 고통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한국의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축구공뿐이었다. 밤하늘이 하얗게 변했다. 따뜻한 액체가 이마를 타고 내리는 느낌이 든 것은 그 다음이었다.

“머리가 아픈 것은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실점한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후배들한테 미안했어요. 내가 막아야 할 선수였으니까요.” 최진철(35·전북 현대)은 2006 독일 월드컵 G조 스위스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펠리페 센데로스에게 첫 골을 내주는 장면을 회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마지막 월드컵 “아쉽지만 미련은 없다”

한국축구대표팀이 귀국한 다음 날인 26일 오전, 최진철과 어렵사리 전화가 연결됐다. 그는 소속팀인 전북 현대의 최강희 감독을 만나러 전주의 훈련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최진철은 센데로스의 머리에 부딪혀 오른쪽 눈 위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응급처치만 하고 바로 그라운드에 다시 들어갔다. 더는 뛸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에 이를 악물고 뛰었다. 실제로 스위스전은 그에게 마지막 월드컵.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그는 대표팀에서 은퇴한다.

“섭섭하기는 하지만 대표팀에서 더 뛰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후배들이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 나가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 낫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주역인 그의 위치는 4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골키퍼 하나만 뒤에 둔 채 모든 상대 선수를 고스란히 몸으로 막아 내야 하는 자리. 이제 그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할 때가 됐다. 미련은 없다지만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많다. 기대도 크다.

“16강 진출 실패는 우리가 뭔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특히 수비가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 아쉽습니다. 생각처럼 조직력이 잘 맞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포백 시스템’이 완벽하게 운영된 것 같지 않습니다. 후배들이 앞으로 훈련을 통해 조직력만 쌓아 간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 심판 오심? 그것이 축구다

스위스전 당시 아르헨티나 출신 주심의 판정은 한국에서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오심을 주장하는 일부 누리꾼은 “재경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라면 더욱 억울했을 듯. 그러나 이에 대한 최진철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운이 나빴다”고 가볍게 대꾸했다.

“심판 판정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어떤 경기에서는 우리한테 좋게 불어 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다 운이죠.”

‘최고참’다운 의연한 대응이고 의젓한 분석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못내 남았을까. 최진철은 뒤이어 “그래도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가 치른 국가대표팀 간 경기(A매치)는 모두 65경기. 이제 푸른 호랑이가 새겨진 붉은 유니폼을 입을 기회는 없다. 스쳐간 한 경기, 한 경기가 모두 소중하겠지만 앞으로의 경기도 이에 못지않게 소중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K-리그가 전부다. 최진철은 그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냈다.“실망스러운 결과였지만 밤을 새워 응원해 주신 축구 팬께 감사드립니다. 성원해 주신 만큼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국가대표팀에 보내 준 응원의 10분의 1만이라도 K-리그에 보내주십시오. 그래서 팬들이 K-리그가 열리는 운동장을 찾아 주신다면 4년 뒤 월드컵에서는 더 많은 한국팀의 경기를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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