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 끝장” 제2 러일전쟁

  • 입력 2002년 6월 9일 23시 33분


1904∼1905년의 러일전쟁으로 근대사에서 양국의 운명이 엇갈렸다. 승전한 일본은 명실상부한 세계 열강의 하나로 발돋움했고 러시아제국은 쇠락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러시아혁명의 원인(遠因)도 이 전쟁에 있었다.

9일 요코하마에서 열린 월드컵 H조 경기에서 양국은 러일전쟁 때와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충돌했다. 이번엔 일본 쪽의 사정이 다급하다는 점이 달랐다. 벨기에전에서 비긴 일본은 러시아전에서 비기거나 지면 세계 16개 축구 열강 대열에 들지 못한다.

러시아라고 해서 느긋한 입장은 아니다. 일본을 눌러야 16강행을 확정지을 수 있다.

월드컵에서는 첫 대결인 양국 경기를 앞두고 여러 의미가 중첩되면서 해묵은 역사의 앙금도 다시 떠오르고 있다.

러시아 언론들은 “순수한 스포츠 경기가 국민의 반일감정을 촉발할 우려가 있다”며 우회적으로 양국의 불행한 과거를 상기시켰다.

일본에서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가 노골적으로 국민감정에 불을 질렀다. 그는 5일 “일본이 러시아에 크게 이기면 (그동안 난항을 겪던) 북방영토 반환협상도 진전될 것”이라며 “스포츠에 정치를 개입시키지 말라고 하지만 국제정치란 그런 것이다”고 포문을 열었다.

양국은 러일전쟁 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충돌했다. 종전 직전에 참전한 당시 소련은 일본으로부터 북방 4개 영토(쿠릴열도)를 빼앗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1승1패인 셈.

축구와 역사를 섞어서 보는 사람들에겐 이번 경기가 역대 전적에서 양국간 우위를 가려주는 셈이다.

일본의 필리프 트루시에 감독은 만약 러시아전을 승리로 이끈다면 러일전쟁당시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격파시킨 일본함대의 명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에는 못 미쳐도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를 전망.

트루시에 감독은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쿠릴열도와 어업권 같은 양국의 분쟁을 이번 경기와 결부시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선수들과 정치를 얘기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축구는 축구일 뿐이라는 얘기. 그러나 남은 750장의 러시아전 입장권을 전화로 판매하자 3분 만에 무려 200여만명이 전화할 정도의 열기를 축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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