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 본보 인터뷰]『우승 잊었어요…또 연습해야죠』

  • 입력 1998년 5월 20일 19시 27분


“세리 팩(Se―Ri PAK).”

17일 오후 (현지시각)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 듀폰 컨트리클럽. 박세리(21)의 이름이 불려지고 다소 수줍은 듯한 표정의 그가 세계 최연소 LPGA (여성프로골프협회) 챔피언에 등극하는 트로피를 받는 순간 IMF스트레스에 찌들어있던 한국인들은 오랜만에 “대한국민 만세다”를 외쳤다. 복서 홍수환이 77년 파나마에서 4전5기끝에 카라스키야를 역전KO로 링에 뉘었을 때처럼.

골프를 ‘있는 자들의 유희’라고 욕하던 사람들도, 파나 버디가 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심지어 LPGA가 무슨 액화석유가스(LPG) 비슷한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이날은 하나가 돼 제 일처럼 좋아했다.

대회가 끝난 지 만 이틀. 박세리는 벌써 자신에게 쏟아지던 환호성과 갈채를 잊은 듯했다.

198일 플로리다 올랜도의 혼자 사는 아파트로 돌아온 그는 이미 평상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렵게 연결된 전화통화에서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가시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지만 좀처럼 흥분하지 않고 담담해 하는 특징이 그대로 묻어났다.

▼ 리드베터 週 1,2회 만나

동양인 최초의 메이저대회 우승 이후 그는 전세계 언론의 인터뷰공세에 몸살을 앓고 있다. 매니저 길성용(吉成勇·28)씨는 아예 CNN 워싱턴포스트 등 25개사로 인터뷰 요청을 잘랐다. 다음 대회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

박세리는 역시 강하고 독했다. “어느날 갑자기 세계 스포츠계의 신데렐라가 됐는데 생활에 달라진 게 없느냐”는 첫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없다”고 잘라 말했다.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말했던 대로 딱 사흘만 휴식을 취한 뒤 28일 개막되는 뉴욕 로체스터대회에 대비한 연습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는 “사흘간 푹 쉬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클럽을 완전히 놓지는 못하고 ‘슬슬’ 연습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수성(守城)이 더 어려운 챔피언의 부담 때문이리라.

만 20세 8개월의 아름다운 청춘. 유혹도 많을 꽃다운 나이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하는 생활은 견딜만 할까.

―평상시 일과가 어떤가요.

“하루 4,5시간씩 연습하고 연습이 끝나면 잠을 자거나 케이블TV 영화를 봅니다. 시합때는 연습시간을 1,2시간으로 줄이고 페이스를 조절하지요.”

―연습은 주로 코치 데이비드 리드베터와 함께 합니까.

“아녜요. 그와는 이제 한 주일에 한 두번 정도 만나 지도받습니다. 그분도 바쁘고 저도 시합일정 때문에 시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주로 혼자 연습해요. 제 정신적 사부는 여전히 아빠죠.”

그는 초등학교 6년때 입문한 이래 하루에 1천개 이상의 연습볼을 때리는 ‘연습벌레’로 유명하다. 그 지독한 연습, 내성적인 성격, 부모 형제 친구를 떠나 혼자 꾸리는 이국에서의 생활. 외롭지는 않을까.

“처음엔 외로움을 많이 탔어요. 그러나 이제는 웬만큼 적응이 됐는지 괜찮네요. 특히 미국이 개방적인 나라여서 그런지 지내기는 좋아요.”

―요리도 하나요.

“부끄럽지만 저는 음식을 전혀 못해요. 언제 배울 시간이 있었어야죠. 주로 사먹습니다. 음식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불편은 없어요.”

―미국 친구 좀 사귀었어요.

“아직 못 사귀었어요. 그러나 몇몇 미국 선수들과는 조금씩 친해지고 있어요.”

―남자친구는….

“아휴, 골프채만 잡고 살았는데 언제 사귈 시간이 있었겠어요.”

그는 이번 대회에서 우승소감을 영어로 말하고 공동기자회견도 별 어려움 없이 해내 주변의 많은 칭찬을 받았다. 올 1월에 미국에 온 그가 언제 그렇게 영어를 공부했을까.

“미국에 온 뒤 개인 영어레슨을 받았어요. 일주일에 두번 두시간씩 받았는데 많이 모자라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생겼어요. 세계적 선수가 되려면 영어능력은 필수예요.”

―이번 대회 우승컵과 상금외에 큰 소득이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자신감입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지요.”

―그럼 앞으로 우승행진을 기대해도 되겠군요.

“그런 것은 아니에요. 건방지게 우승을 몇 번 할지 단언할 수 있나요. 다만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면 세계무대에서 얼마든지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말하는 거지요.”

▼ 골프는 자신과의 싸움

―미국에 건너온 뒤 스윙폼이 바뀌었나요.

“바뀐 것은 없지만 전보다 간결해지고 안정됐다는 느낌이 들어요.”

―스윙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게 뭡니까.

“리듬입니다. 리듬감 없이는 좋은 스윙이 나오지 않아요.”

―보통 4시간 걸리는 경기 동안 정신집중을 유지하는 비결은 뭔가요.

“한국에 있을 때는 자정까지 연습한 뒤 혼자 집까지 걸어다녔어요. 일종의 담력훈련이지요.”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선수는 누굽니까.

“없어요. 골프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즐기고 만족하면 되는 것이지 꼭 누구를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안하려고 하죠.”

―드라이브 비거리가 평균 2백56야드로 장타자인데 만족합니까.

“좀 더 늘리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

―골퍼들의 수명은 어떤 운동보다도 긴 편입니다. 포부를 말해보시죠.

“나이가 적기 때문에 앞으로 기회가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정한 것은 없습니다. 정진하고 또 정진하는 거지요.”

그는 요즘 목걸이 귀고리 치장을 하고 경기가 없을 때는 화장도 하는 등 ‘여성’임을 의식한다는 말을 듣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행복에 대한 부러움은 없을까.

“언젠가는 친구들과 어울린다거나 취미생활도 열심히 하고 가정도 꾸리는 날이 오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국내 인터뷰에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면 결혼할 것’이라고 한 적이 있던데 거짓말이 되겠군요.

“메이저대회 우승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면서 농담삼아 한 말이죠.”

95년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아마골프선수권대회에서 마지막날 65타로 코스레코드를 기록하며 우승하자 대회관계자들이 붙여준 ‘슈퍼 걸’이 별명이 된 박세리. 미모 힘 기량 정신력 등을 고루 갖춘 그의 힘찬 비상은 오랫동안 이어질 듯하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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