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 명지대 바둑학과 폐지… “한국 경쟁력 떨어질라”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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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년 3월 27일 16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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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건 바둑밖에 없어 그 묘미가 큽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는 것 같아요. 노인들만 바둑 둡니다.”

27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의 한 기원. 43년째 바둑을 두고 있다는 조원국 씨(73)의 말이다. 기원에는 노인 20명이 두세 명씩 모여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의 한 기원에서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다. 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의 한 기원에서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다. 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이를 분위기를 반영하듯 세계 유일 바둑학과인 명지대 바둑학과가 내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기로 했다. 명지대는 25일 교무회의를 열고 바둑학과 폐과를 결정했다고 27일 밝혔다.
1997년 개설된 명지대 바둑학과는 한종진 9단과 양건 9단, 이민진 8단 등 19명의 프로 기사를 배출했다. 하지만 학교 측은 경영 악화와 바둑을 두는 젊은 층이 감소하는 이유 등으로 폐과를 결정했다. 2022년 처음 논의가 시작됐을 당시 ‘마인드스포츠(경영)학과’로 개편될 예정이었으나, 점차 폐과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2022년 바둑학과 폐과 반대 운동을 하는 명지대 학생들. 동아일보DB
2022년 바둑학과 폐과 반대 운동을 하는 명지대 학생들. 동아일보DB
재학생과 교수들은 반발하고 있다. 바둑학과 학생회장 김한결 씨(24)는 “학생들은 폐과 확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학생회 차원에서) 폐과 반대 운동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바둑학과 교수들 역시 이날 오후 1시 30분경 관련 회의를 열었다. 남치형 바둑학과 교수는 “일본, 중국 쪽에서 유학생들이 많이 오고 있는 상황에서 폐과를 결정한 게 굉장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실제 명지대 바둑학과에는 독일과 프랑스, 브라질 등 세계 각국 출신 학생이 다녔다. 헝가리 출생의 한국기원 프로초단인 디아나 사범도 유럽과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2005년 명지대로 유학온 후 2008년 프로 기사가 됐다.

한국의 바둑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최근 신진서 9단이 중국 상하이에서 끝내기 6연승으로 세계 바둑의 새 역사를 쓴 가운데, 이 흐름을 역행할 수 있다는 것. 학과 폐지 확정 이후 국내 바둑계에서는 학과 폐지를 두고 반대하는 목소리 이어졌다.

유튜브 ‘숏츠(1분 미만의 짧은 동영상)’ 등 자극적인 콘텐츠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바둑을 외면하고 있어 위기가 가속화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직장인 김도연 씨(26)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영상만 봐도 시간 가는 모르는 시대”라며 “별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콘텐츠들이 많아서 머리 쓰며 해야 하는 바둑에는 관심이 잘 가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대한바둑협회에 따르면 바둑을 둘 줄 아는 인구의 추산 비율은 2000년 32%에서 올해 19.4%로 떨어졌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21억 원였던 대한바둑협회 지원 예산을 올해 전액 삭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활(돌이 죽고 사는 법) 등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어 여전히 매력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1월 대한바둑협회가 발표한 ‘바둑에 대한 국민인식 및 이용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바둑을 두지 않는 응답자 중 62.9%가 ‘바둑을 배울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대한바둑협회는 27일 “학생들을 고려하지 않은 폐과 결정에 강력히 유감을 표한다”며 “바둑학과 진학을 희망하던 학생들의 꿈이 짓밟히는 일이 없도록 관련 기관과 협의해 대안을 만들겠다”고 했다. 한국기원은 “2022년부터 반대 성명을 내는 등 폐과 재고 의견을 여러 방면으로 전달했다”며 “최근 프로 기사들이 맹활약해 바둑의 위상이 높아진 시점에서 폐과 결정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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