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통증은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미국인 하워드 해리스는 6·25전쟁에 참전해 훈장까지 받은 참전용사. 용맹했던 그를 바꾼 건 찰나의 사고였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허리가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의사는 단순 근육경련이라 진단했지만, 이후 순간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하워드를 진짜 힘들게 한 건 통증 자체보다 이를 용인해주지 않는 세상이었다. 수시로 병가를 내는 직원을 참아줄 직장은 없었다. 가족마저 가계에 보탬이 안 되는 그를 가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디 가서 아픔을 토로할 수조차 없었다.
“이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제 통증을 볼 수 없으니까요. 가끔은 사람들이 제 말을 안 믿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이게 저를 정말 미치게 합니다.”
미 하버드대 의과대학 교수로 30년간 2000명이 넘는 환자를 만나온 저자 아서 클라인먼은 하워드처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환자들에 천착했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는 현지에서 1988년 첫 출간됐는데, 만성질환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환자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명저로 꼽힌다.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2020년 개정판 버전. 만성통증증후군이나 만성피로, 우울증 등 오래된 질환을 앓는 환자 20여 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의 속내를 읽다 보면, 통증도 심각한 문제지만 그에 무감한 세상의 시선이 환자들을 더 고립시킨다는 걸 깨닫는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앓는 중국인 여성 옌. 그의 병을 이해하려면 그가 살아온 생애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엘리트 계급에 속했던 옌의 가정은 문화혁명을 거치며 ‘냄새나는 지식인’이라 지탄 받은 대상으로 전락했다. 집 밖에 나서면 누군가 손가락질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만성두통과 피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교육과정도 제대로 마칠 수 없었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며 자포자기했다. 옌의 사례는 사회적 낙인과 차별이 한 사람의 몸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질병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녹아 있기에 진통제 한 알로 치유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마주한 첫 번째 환자가 그랬다. 의대에 재학할 당시 응급실로 실려 온 전신화상을 입은 일곱 살 아이였다. 그 어린애가 화상 부위의 살갗을 벗겨내는 끔찍한 치료를 매일매일 견뎌야했다. 풋내기 의대생이던 저자는 온몸으로 토해내는 비명을 들으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아이의 손을 붙잡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저자는 아이에게 “어떻게 이 고통을 견디는지, 치료를 겪는 느낌이 어떤지”를 물어봤다. 그 순간, 변화가 찾아왔다. 고작 일곱 살배기 아이가 자기만의 어휘를 이용해 정확하게 통증을 설명했다. 이후부터 치료실에 들어서는 아이는 전보다 훨씬 씩씩하게 고통을 견뎌냈다. “환자는 누구나 자신의 질병에 대해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걸 해내는 순간 자기 자신에게 그 고통을 감내할 힘도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물론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이 옳다고 하긴 어렵다. 플라시보효과도 있다지만, 어쨌든 치료는 과학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그 최전선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저자 말마따나, 어쩌면 환자와 그 가족이 겪는 고통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공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치료법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이 책은 미국과 일본 등에서 여전히 ‘의료인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출간된 지 34년이 지났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메시지가 많기 때문이다. 치료는 상처가 아니라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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