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 문산시가지 전체를 뒤덮었던 대홍수가 기억나 옷가지만 챙겨 얼른 대피소로 뛰어왔어요.”
지난 5일 밤 임진강 수위 상승으로 문산지역의 저지대 주민 대피령이 내려진 가운데 인근 학교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한 노인은 과거 문산시가지의 물난리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낮 오후 4시 30분 한강홍수통제소가 임진강 비룡대교 일대에 대해 ‘호우경보’를 발령한데 이어 밤이 되자 비룡대교 수위가 대홍경보 단계인 13.6m에 육박하자 파주시는 오후 10시 20분을 기해 문산읍 저지대 주민 2254가구 4228명에 대해 긴급 대피령을 내렸다.
많은 시청 공무원들도 퇴근 후 귀가하지 않고 이날 문산행복센터로 집결한 뒤 대비책을 점검하며 시시각각 높아지는 수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공무원 A씨는 “오후부터 긴장감이 돌았다. 최근 몇 십년간 보지 못한 형태의 비가 내린 탓에 수위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민들의 안전이 가장 걱정됐다”고 말했다.
이들 공무원들은 대피문자가 발송된 이후 지역을 나눠 일일이 집을 방문해 혹시 남아있을지 모르는 주민들에게 대피를 안내했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대피를 거부해 공무원들을 애먹이기도 했다.
공무원 B씨는 “약간 지대가 높다고 생각되는 특정지역 마을은 주민들은 ‘설마 잠기겠냐’는 반응과 함께 대피를 거부했다. 강제로 대피시킬 수도 없고 문 앞에서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대피소로 모인 주민들은 이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문산의 한 초등학교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에는 1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대부분 중장년층 주민들로 젊은 층과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성모씨(67)는 “자연부락이다 보니 노인들만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있더라도 대피소에 오겠냐. 아마 PC방이나 찜질방에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예방하기 위해 대피소 바닥에는 파주시가 미리 마련한 침구류 등이 2m 이상 간격을 두고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대피소로 오는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일부 주민들은 잠을 청하려 누워보지만 실내의 밝은 불빛과 이웃들의 웅성거림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강모씨(47·여)는 “대피하라고 해서 오긴 했지만 금방 돌아갈 수도 있어 잠은 자지 않을 것”이라며 “남편도 불어나는 임진강물을 보려 밖에 나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많은 주민들은 이번 호우에도 불구하고 과거 90년대 중반 되풀이되던 대홍수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봤다.
유모씨(64)는 “20여 년 전 대홍수 때는 임진강 둑이 낮고 허술해 뚫렸지만 이후 수천억원을 들여 제방공사를 해왔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며 “강물이 넘치더라도 농경지 일부가 피해를 입는데 그치지 않겠냐”며 낙관했다.
이튿날인 오전 4시를 전후해 임진강 수위가 차츰 낮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주민들에게 전해지자 날이 밝기 시작하면서 주민들은 하나 둘씩 옷가지를 챙겨 귀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주민은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아 집에 가기로 했다. 아침도 챙겨 먹어야 하고 특히 밤사이 강풍으로 피해가 없는지가 궁금하다”고 밝혔다.
한편 이들 주민들의 대피 기준이 됐던 임진강 비룡대교 수위는 오전 3시 20분에 13.54m의 최고점을 찍은 뒤 가장 고비가 됐던 오전 6시 30분 만조를 지난 뒤에도 현재 13.3m를 유지하고 있다.
파주시는 홍수경보가 해제되지 않고 있는 이상 주민들이 안전수칙을 따라줄 것을 요청하며 수위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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