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는 암울한 시대 우리 민족의 ‘희망자본’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0일 16시 36분


코멘트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뿌리 깊은 나무’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백범 김구와 현대사 연구에 정통한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6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과 한국사회학회장을 지낸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64)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머리를 맞댔다.

백범 전문가인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왼쪽)와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장을 지낸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대담
백범 전문가인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왼쪽)와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장을 지낸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대담

―우리 역사에서 임정의 의미는?


▽박명규=암울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희망 자본’, ‘상징 자본’이었다. 민중이 공화국의 주권자라는 개념이 명료하게 헌정 원리로 자리 잡은 것도 임정이 시작이고, 제헌헌법으로 이어졌다.

▽도진순=임정 수립의 바탕이 된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거대한 수원(水源)과 같다. 농민, 여성, 노동자, 학생의 대 각성이 일어났고, 이들이 독립운동의 물결로 일어났다.

―100주년 맞아 관련 행사도 많았다.


▽박=3·1운동과 임정의 가치를 알리는 건 뜻 깊은 일이다. 양적으로 많은 건 좋지만 질적 풍성함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세계적 평화질서 구축과 3·1운동을 연결하는 시야 확장이 필요하다. 100주년을 맞아 토론의 쟁점들이 새로 생겨야 앞으로도 주요 화두로 자리 잡을 텐데, 마치 말끔하게 결론을 맺으려 했던 건 아쉽다.

▽도=대통령 직속 100주년 기념위의 최근 학술포럼 제목이 ‘3·1운동에서 촛불혁명으로, 임정수립에서 통일 한반도로’다. 일부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호명하면서 ‘촛불혁명’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강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임정을 통일과 연결짓기 위해서는 임정이 지난날 해방 직후 국내에 들어와 좌우·남북이 대립하는 국면에서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성찰해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다.

▽박=‘3·1혁명’이냐 ‘3·1운동’이냐는 표현 문제는 최근 불거진 게 아니다. 제헌헌법 초안도 ‘기미삼일혁명’으로 출발했다. 최근 3·1운동을 저항 뿐 아니라 민중의 각성,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기원으로 조명하면서 혁명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만 논의가 자연스럽게 쌓여 가면서 시대적인 규정으로 용어가 자리 잡는 것인데, 너무 100주년에 맞추려하는 조급함이 느껴진다. 오히려 주체들의 다양한 면모와 성격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도=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 3·1운동 당시 국제정세에 대해 일면적 파악이 심했다. 2·8독립선언서나 기미독립선언서에는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과정과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인식이 보인다.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제국들이 1차 대전으로 무너지니, 폴란드는 1918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곧바로 독립했다. 이처럼 임시 정부는 정당과 달리 투표 등으로 국민의 주권을 확인해야 해 5년 정도의 길지 않은 기한을 예상하고 수립된다. 그러나 두루 지적하다시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승국 식민지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동아시아에서 일제의 힘은 더 강해졌다. 임정은 수립 5년도 채 안 돼 해체론 등 대대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박=지도부가 최적의 정치적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지 못한 한계는 있다. 그러나 3·1운동에서 지도부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다소 추상적이고 원론적으로 느껴져도 그만큼 긴 울림을 갖는다. 결과론이지만 1930년대 중국 국민당정부와의 협력, 카이로 회담 등 전후 처리 의사결정에 한국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노력 측면에서는 임정이라는 조직형태를 지킨 것이 타당했다고 보인다. 임정이라서 명분이나 국제적으로 잠정적 대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그나마 가졌던 것 아니었을까.


▽도=우리가 국제 정세를 낙관적으로 오판한 것이 1919년만이 아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기운 시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백범일지’나 ‘안응칠 역사’, 2·8독립선언에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2차대전 종전으로 광복되자 마찬가지 실수를 했다. 물러가는 일본만 보고 ‘해방’이라 낙관했지만, 곧바로 신탁통치가 거론되고 분할 점령된 국제정세를 당면하게 된다. 이러한 엄중한 정세를 직시했더라면 좌우대립이나 정권 투쟁이 실제보다 덜했을 것이다.

▽박=임정은 30년 가까운 실천의 물줄기다. 다양한 형태로 변했고, 여러 세력들이 들어오고 나가기도 했다. 이를 마치 결집된 단일한 정부 캐비닛 조직으로 이해하는 건 잘못이다. 정통론적 시각으로 접근해 임정 이외의 운동이나 세력, 주체 조직을 평가절하하거나 비정통을 가르고 배제하는 건 좋지 않다.

▽도=전적으로 동의한다. 협애한 정통론으로는 항일독립운동의 폭과 깊이, 해방 정국의 역동성을 포괄할 수 없다. 해방 직후 중국 충칭에서 임정 내부에서도 해산론이 거론됐다. 귀국 이후 임정법통론의 강화를 추진했지만 남한 내 인민공화국 세력과 좌파, 미군정, 북한의 김일성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등 3면으로 대립했다. 우파 내의 이견도 있었다. 결국 미군정의 자문기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흡수돼 버린다. 김창숙 선생은 이를 ‘임정에 의한 임정의 해소’라고 했다. 정당과 달리 정부 형태는 합작과 연대가 만만치 않다.

―오늘날 정세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하나?



▽도=한반도를 분단체제로 바라보면 ‘통일’이 목표가 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더 위력적인 것은 북미대립을 축으로 하는 정전체제다. 분단체제론에서는 흔히 문화 경제 스포츠 등이 풀리면 정치·군사·안보 문제도 풀릴 수 있다고 본다. 경제협력을 강화하면 평화통일이 된다는 평화경제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전체제에서는 정치, 군사, 안보가 가장 중요하다. 동서독과 달리 우리는 전쟁을 치렀다. 개성공단 같은 경제협력도 앞으로는 정치군사적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박=남북한은 유엔 회원국이다. 북한은 북핵문제를 둘러싼 국제 협상에도 주권체로 참여하고 있다. 만약 미국 북한 간 평화협정이 맺어진다면 북한이 가진 국가로서의 지위, 성격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남북한을 성격이 다른 두개의 분단국가가 국가라는 실체로서 대립하고 있다고 냉정히 보는 것이 필요하다. ‘분단국체제’라는 인식 틀을 제안한다. 성격이 매우 다른 두 분단국가가 별개의 국가라는 걸 인정하고 어떻게 공존하고 평화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관한 합의된 규율과 틀을 마련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도=“진정한 선구자들은 미래뿐만 아니라 잊혀진 과거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다”는 보르헤스의 구절을 좋아한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이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직시하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화두를 끄집어낼 수 있게 반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박=옳다. 100주년을 이벤트와 잔치로 끝내서는 안 된다. 미래를 여는 감수성으로 확장해야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백범 전문가인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왼쪽)와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장을 지낸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대담
백범 전문가인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왼쪽)와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장을 지낸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대담


▼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 약력

△1993년 서울대 국사학 박사 △1993년 창원대 사학과 교수 △1995년 국회 법제사법위 산하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 전문자문위원 △1998년 참여연대 운영위원 △2001년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2002년 창원대 박물관장 △2006년 한국사연구회 이사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 △2007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약력

△1991년 서울대 사회학 박사 △1983년 전북대 사회과학대 교수 △1994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02~2004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소장 △2011년 국립대학법인 서울대 이사 △2014년 대통령직속 통일준비위원회 사회문화분야 민간위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