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여성 구한 ‘쪽방촌 산타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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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을 찾은 아이티 여성 아당 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주민들이 손으로 하트를 그리며 반가워하고 있다. 어렵게 사는 이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이 계기가 돼 아당 씨는 서울에서 수술을 받아 건강을 되찾게 됐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을 찾은 아이티 여성 아당 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주민들이 손으로 하트를 그리며 반가워하고 있다. 어렵게 사는 이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이 계기가 돼 아당 씨는 서울에서 수술을 받아 건강을 되찾게 됐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메르시, 메르시(Merci·감사합니다의 프랑스어). 우린 천국에서 다시 만날 거예요.”

8일 오후 9시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3층짜리 가건물 1층의 사랑방에서 낯선 곡조가 흘러나왔다. 아이티 국적의 아당 씨(65·여)가 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자 쪽방촌 주민 20여 명이 “살아나줘서 고맙다”며 아당 씨를 잇달아 끌어안았다.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 없지만 아당 씨 눈에 눈물이 고였다.

7월 17일 아당 씨는 서울성모병원에서 8시간 동안 반흔구축(瘢痕拘縮) 수술을 받았다. 허벅지에서 피부 조직을 떼어 내 괴사가 일어난 목에 이식했다. 아이티에서 아당 씨는 썩어 가는 이를 치료하러 병원에 갔지만 “돈이 없으면 치료해 줄 수 없다”며 쫓겨났다. 길바닥에 쓰러진 아당 씨를 현지의 ‘꽃동네’ 수녀들이 구조했을 때는 생명이 위독했다. 목에서부터 시작된 괴사 때문에 가슴뼈가 드러날 정도였고 문드러진 살에는 구더기가 득실댔다.

아당 씨를 구한 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가난과 질환, 고독감에 빠진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이었다. 이곳에는 장애인과 홀몸노인, 버려진 여성과 아이 등 300여 명이 산다. 휠체어나 목발에 의존하는 장애인부터 허공을 보며 혼잣말하는 정신질환자도 있다. 가족과 연락이 끊긴 중·장년층도 많다. 이들이 1년 동안 모은 돈 100만 원으로 아당 씨는 수술을 받게 됐다. 사연을 들은 서울성모병원이 아당 씨를 초청해 무료로 수술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이들과 아당 씨의 인연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쪽방촌 사람들은 ‘세상에서 버려졌다’는 생각이 강했다. 낯선 사람이 골목에 들어서면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다 화를 내기도 했다. 이곳에 음성 꽃동네 수녀들이 찾아왔다. 수녀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이들의 몸 상태를 살피고 말벗이 돼 주었다. 때때로 먼 나라 아이티 이야기도 들려줬다. 수녀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해 자원봉사를 하는데 아이들이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적거리고, 여성은 성범죄에 노출되며, 노인은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간다는 얘기였다.

타인을 동정할 겨를이 없었던 쪽방촌 사람들은 아이티 이야기를 들으며 변해 갔다. 수년 전 노숙하면서 질병과 범죄에 노출됐던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수녀들이 찾아오는 화요일마다 하루 평균 5000원으로 사는 이들이 꼬깃꼬깃한 지폐며 동전을 내놨다.

5월까지 서울역 인근에서 붕어빵을 팔던 김병욱 씨(55)는 하얀 약통 20개를 건넸다. 중증 당뇨를 앓고 있는 김 씨가 먹은 약 대신 통에 가득 든 것은 100원, 500원짜리 동전과 1000원짜리 지폐였다. 8개월간 번 돈 50만 원 전액이었다. 김 씨는 “나는 기초생활수급자라 병원비가 싸다. 붕어빵 팔아서 생긴 돈을 나처럼 아픈 아이티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했다.

아이티 얘기를 하면 “우리와는 상관없는 얘기”라며 화를 내던 박모 씨(65)는 수녀들이 갖고 다니는 보라색 헝겊주머니에 동전을 몰래 넣었다. 빈 병과 폐지를 주워 모은 돈이었다. 장애인들은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인연금을 아껴 수녀들에게 줬다. 김정심 씨(63·여)는 “한때 길거리로 내몰려 봤기 때문에 아당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 안다. 끼니를 덜 먹더라도 돈을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수녀들은 아당 씨가 수술을 받게 되자 “쪽방촌의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당 씨가 다녀간 뒤 어두운 쪽방촌 골목에서는 ‘감사의 노래’가 들리곤 한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동자동 쪽방촌#꽃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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