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록하듯 쓴 학생수행실록, 시골학교 기적의 비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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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전국고교평가 강원 1위 오른 김화고 원성용 교장

김화고 원성용 교장(가운데)이 최근 학생자치회 학생들과 학교 점퍼를 입고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며 미소를 짓고 있다. 김화고 제공
김화고 원성용 교장(가운데)이 최근 학생자치회 학생들과 학교 점퍼를 입고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며 미소를 짓고 있다. 김화고 제공
 찬바람에 실려 온 대남방송 소리가 창문을 때리며 새벽의 침묵을 깬다. 교직원 관사에서 잠자는 교장에겐 알람시계가 필요 없다. 강원 철원군 서면 와수리 김화고의 원성용 교장(60)은 1일 김화고를 “군사분계선과 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벽지 학교”라고 소개했다. 중부전선 최북단이라 근처에 군부대가 많다. 학교 주변에서 질주하는 탱크를 보는 일도 일상 중의 하나다. 주민 삶의 터전이 논밭이라 인근에 학원도 없다.

 김화고는 지난해 12월 29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2016학년도 전국 고교 평가에서 강원 지역 1위를 차지했다. 전교생이 25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를 이끄는 원 교장이 2015년 9월 부임 후 교사들을 들들 볶아댄 결과다.

 그가 도입한 첫 번째 시도는 ‘학생수행실록’이라는 작은 수첩이다. 원 교장은 교사들에게 평소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평가하라며 실록을 쥐여줬다. ‘학종(학생부종합) 입시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다. 원 교장은 누가 시키지도 않은 트럼펫 자율 동아리를 만들고 학생들을 모아 지도교사를 맡았다. 실록에 학생들의 활동 내용을 기록하고 이를 교사들에게 보여주며 입시 경향과 실록 활용법에 대한 특강도 열었다. 초반에 귀찮아하던 몇몇 교사는 교장이 실록을 들고 다니며 기록하는 모습에서 진심을 확인하고 한마음이 되기로 했다. 현재 김화고의 모든 담임·교과 교사는 전교생의 학교생활을 1년 내내 틈틈이 기록한다.

 원 교장은 “학생부는 학생과 교사를 이어주는 신뢰의 끈”이라며 “김화고 학생수행실록은 교사의 지도 역량과 학생에 대한 애정을 증명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했다. 그는 “조선시대 사관이 실록을 쓰는 마음으로 학생들을 관찰하고 사실 그대로 기록해 ‘논픽션 학생부’를 만드는 건 교사의 책무”라고 말했다.

 정년을 불과 1년 앞둔 원 교장이 학생들에게 이토록 열을 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경찰관이던 그의 아버지는 5남매의 막내인 원 교장이 11세 때 물난리로 목숨을 잃었다. 이례적인 장마는 아버지를 삼켰고 시신도 돌려주지 않았다. 당시 교사들은 학기 초마다 가정환경 조사를 한다며 반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 없는 사람?” 하고 물었다. 어린 원 교장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손을 안 들었다가 교사에게 불려가 크게 혼이 났다. 속이 상해 며칠을 울었다. 어릴 적부터 교사의 꿈을 키우던 원 교장은 양 볼에 줄줄 흐르는 눈물 앞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편식 없는 교육, 편견 없는 교사, 편애하지 않는 교사가 돼야지. 아이들에게 절대 상처를 주지 않는 선생님이 되리라.”

 그가 학생들의 학교생활에 그토록 신경 쓰는 건 입시든 취업이든 아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사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화고는 기초학습능력이 부진한 학생을 낮 시간에 따로 모아 공부시키고, 교사는 대부분 관사에 머물며 수시로 소규모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실제 학생들의 대학입시 성적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재까지 고3 학생 81명 중 수시로만 21명이 서울대 경희대(의예과) 등 수도권 대학에 합격했다. 인원은 물론이고 상위권 학과 합격자도 늘었다. 원 교장은 “공정성 결여 등 학종에 결점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잘 활용하면 시골 아이들이 공교육만으로 입시에 성공할 수 있는 ‘복음’ 같은 제도가 될 수 있다”며 “과거엔 학생의 대학 합격, 불합격이 시험 당일 수성사인펜 끝에 달려 있었지만 이젠 교사 손끝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노지원기자 zone@donga.com
#학생수행실록#시골학교#김화고#원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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