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림 설예원 원장은 전북에 차 문화를 확산시키고 대중화한 전북 차 문화계의 대모다. 그가 최근 20여 년간 배출한 정규 차 교육과정 제자들만 1000명이 넘는다. 그는 차는 삶에 쉼표를 찍는 것이라며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쉬는 시간이 좀 더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북도 제공
# 4월 21일 전북 전주시 교동 르윈호텔. 대한적십자사 자문위원 총회가 열리는 동안 참석자 400여 명에게 종이컵에 믹스커피가 아닌 단아한 찻잔에 제대로 우린 녹차와 황차가 제공됐다. 참가자들은 “예향 전주는 역시 뭔가 다르다”며 찬사를 보냈다.
# 5월 6일 전주한지문화축제에 참여한 주한 외교사절과 가족 등 100여 명은 전북대박물관을 둘러본 뒤 녹차와 함께 차 음식을 체험했다. 송홧가루, 인삼으로 만든 다식(茶食)과 차를 우린 물로 지어 만든 주먹밥, 찻잎 튀김 등을 맛본 외교사절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음식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 “한국에 이처럼 품격 있는 차 문화와 차 음식이 있는 줄 몰랐다”며 한 여성의 손을 꼭 잡았다. 그가 바로 이림 다례학당 설예원 원장(60·한국차문화협회 부회장 겸 전북지부장)이다. 그는 전북에 차 문화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키고 뿌리내리게 한 ‘전북 차 문화계의 대모’다. ○ 전북 차 문화계의 대모
이 원장은 20대인 1980년대 초 절에 다니며 스님들에게 차를 얻어 마셨다. 차를 마시면 마음이 편해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이 좋은 차를 많은 사람들과 항상 마실 수 없을까.” 그러나 고향 전주에는 차를 제대로 배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차 문화 선진지라 할 수 있는 부산으로, 광주로 다니면서 “전북에 전통 차 문화를 한번 보급해 보자”고 결심한다. 때마침 월간 ‘다담’이라는 잡지에서 4년제 차인(茶人) 교육 프로그램이 개설되자 정식으로 차 공부를 시작했다.
교육을 마치고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산방다회(山房茶會)를 열었다. 전북불교대학과 우석대 등에서 차 특강을 하면서 차를 가르칠 교육 장소와 차를 알릴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문을 연 것이 덕진구 호반촌의 다례학당 ‘설예원’이다. 덕진호수 옆에 전통차를 파는 ‘차마당’도 열었다. 이때가 1989년. 전주에서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호숫가에 작고 나지막하게 자리한 이 찻집에 대한 추억을 하나쯤 갖고 있다.
이 원장은 찻집 운영보다 다도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997년부터 취미과정 1년, 사범과정 3년(2급), 4년(1급) 과정을 개설하고 교육생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배출한 사범급만 260명이다. 취미과정은 53기에 걸쳐 1000여 명에 이른다. 취미 과정에서는 차 우리는 법, 녹차 만들기(제다), 차 음식 만들기, 생활예절 등을 배운다. 사범교육에서는 여기에 더해 동다송, 다신전 등 차에 관한 고전을 읽고 동양철학과 복식사, 미술사, 건축사, 관혼상제까지 배운다.
설예원은 그 뒤 전주시 중앙동 전북예술회관 앞으로 옮겼다가 한옥마을에서 다례 체험과 한옥 숙박시설로 7년을 이어왔다. 최근에 한옥마을 임대료가 크게 올라 태평동 SK아파트 앞으로 이전했다.
이 원장은 1992년부터 전통차를 널리 알리기 위해 연꽃이 만개하는 7월 초 덕진공원에서 연꽃차회를 열고 차와 함께 즐기는 전주화전놀이도 10년 이상 계속하고 있다. 청소년 차 예절 경연대회와 백일장을 개최하고 인성교육 차원에서 다동(茶童)학교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2011년부터는 전주시 완산구의 400년 된 경로당인 기령당에서 80세 이상 퇴직 공직자들을 위한 전통 의례인 ‘기로연’을 재현하고 있다. 노인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해차와 제호탕을 올리고 부채를 선물한다.
10여 년 전부터는 직접 차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용운리 옥정호 옆에 자리한 운설다원은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차 맛 또한 일품이다.
○ 차는 삶에 찍는 쉼표
이 원장은 차를 오행(五行)을 갖춘 음료라고 설명한다. 차를 만들 때 필요한 물(水)과 찻잎의 나무(木), 차 끓이는 불(火), 주전자(金), 그리고 찻잔을 만드는 흙(土)이 조화를 이루며 차를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오행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차를 마시면 마음이 편해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얼굴에 빛이 돈다는 것이다. 우리 전통다도에서는 ‘중정(中正)’을 강조한다. 치우침이 없이 적당히 알맞게 하라는 것이다. 정신과 인격 수양의 방편이기도 했다.
그는 차가 기본적으로 갈증을 달래주는 음료이지만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생명수’라고 말한다. 삶에 쉼표를 찍는 것이라고도 했다. 바쁜 현대인들이 차 우리는 시간만이라도 한가함을 찾고 마음을 씻어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옛날 재판관들은 형을 선고하기 전에 ‘차때’를 가졌다고 해요. 정신을 맑게 하는 차를 마시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던 것이죠.”
이 원장은 예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배우던 ‘밥상머리 교육’은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 핵가족화로 가족들이 한 상에 모여 밥을 먹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대신 시간 나는 대로 차를 한 잔 놓고 대화하는 ‘찻상머리 교육’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꼭 녹차일 필요는 없어요. 커피도 좋고 주스라도 상관없습니다. 맹물이라도 잘 끓여서 천천히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면 그게 교육인 것이죠.”
그는 그동안 모아 온 다기(茶器)와 차에 관한 책을 널리 알릴 ‘차 문화 자료관’을 세우는 게 꿈이다.
“거리에는 카페가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손에 커피를 들고 다닙니다. 어느 시대나 흥망성쇠가 있듯이 차도 유행을 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녹차는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마셔왔고 마음을 달래줄 뿐 아니라 문화와 결부돼 있기 때문에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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