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대자보 앞 10초, 지나치거나 스마트폰 보거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대학 총학생회, 아∼ 옛날이여

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후문 대자보 게시판 앞을 학생들이 걸어가고 있다. 게시판에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 방문 때 벌어진 학생 시위를 막은 경찰과 학교,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대자보 등 여러 장이 붙어 있지만 눈길을 주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후문 대자보 게시판 앞을 학생들이 걸어가고 있다. 게시판에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 방문 때 벌어진 학생 시위를 막은 경찰과 학교,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대자보 등 여러 장이 붙어 있지만 눈길을 주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대자보를 붙여 놓은 게시판 앞을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초 남짓. 그 시간에 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통화를 하며 대자보를 스쳐 지나갔다. 친구와 얘기를 나누며 혹은 수업에 쓰일 출력물을 들여다보는 학생도 있었다.

바로 오른쪽에 빼곡하게 붙은 대자보에 눈길을 주는 학생은 찾기 힘들었다. 20분 넘게 지켜봤지만 멈춰서 대자보를 들여다보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5일 오전 10시쯤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후문 근처 대자보 게시판 주변에서 관찰한 모습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 고시 강행 철회하라”, “총장은 학생들에게 공개 사과하라”, “캠퍼스 내에, 독재가 돌아왔다”와 같은 제목으로 쓰여진 대자보는 대학생들이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또렷한 목소리를 내며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1980, 90년대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각 대학 총학생회의 이런 목소리에 이제 학교 구성원들 대부분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대자보에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은 이 학교 4학년 안지수 씨(23·여)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기보다 지금 대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싶다”며 “대학생들이 목소리를 높인다고 뭐가 크게 바뀌는 시대도 아니지 않으냐”라고 반문했다.

대학 본부에 외면당하는 총학생회

지난달 14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는 서재우 고려대 총학생회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염재호 고려대 총장이 ‘성적장학금 폐지’를 핵심으로 하는 장학금 제도 개편안 발표를 예고한 상황이었다. 이에 앞서 기자회견을 연 서 총학생회장은 “장학금 제도 개편이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정책 결정 과정에 우리의 목소리가 전혀 들어가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실망했다”고 했다. 총학생회는 새로운 제도에 반대한다고 하지 않았다.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았다며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학생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인데 학교 측이 총학생회에 의견을 묻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기자회견에서는 강민구 부총학생회장도 “대학원생 행정조교 폐지를 비롯한 여러 가지 결정에서 일방적이던 학교가 장학금 제도 개편까지 일방적으로 진행해 참다 참다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은 고려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이 크게 줄어들면서 이제 대학 본부가 학교의 주요 정책을 추진할 때 총학생회를 ‘협상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송준석 연세대 총학생회장은 “현재의 정갑영 총장은 총학생회에 상당한 패배감을 안겨 줬다”고 말한다. 수강신청 제도 변경처럼 학생들에게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도 학교 측이 총학생회의 의견을 들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난달 보름간 교내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던 손솔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은 “학교 측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아예 수렴하려 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손 회장은 학교 측에 ‘정책 예고제’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학생 호응 줄어들며 ‘추락’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대학가에서는 2000년대 이후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과 호응이 갈수록 줄어들었다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총학생회장이 학교 안팎을 넘나들며 민주화 투쟁을 이끌고 유명 연예인을 넘어서는 인기를 누리던 과거와 달리 총학생회 활동 자체가 학생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 안에서의 발언력도 크게 약해졌다는 것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보직 교수는 “총학생회장은 여전히 대학 내 주요 협의 기구의 당연직 위원”이라며 대학의 의사 결정에서 중요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교수도 “총학생회가 내는 목소리가 일반 학생들의 요구와 상당한 괴리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 때문에 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힘이 많이 떨어진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대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학점과 갖가지 ‘스펙’ 쌓기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는데 총학생회가 정작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에 학생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대학가에서는 총학생회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동아리를 비롯한 학생 활동 전반이 위축된 상황이기도 하다.

연세대 송 총학생회장은 “지금 대학생들은 사회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자체가 낮아진 것 같다”며 “과거처럼 지성인이라기보다 이제 취업을 준비해야 하고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급급한 상황으로 떨어지면서 사회적 활동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총학생회의 ‘소통 부재’를 지적하기도 한다. 고려대 정경대 신문사 ‘호안스’ 편집국장 이기욱 씨(20)는 “총학생회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사회 문제나 정치 이슈에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한 반감이 크다”며 “총학생회의 정치적 입장에 찬성하더라도 일방적으로 입장을 정해 전체 학생의 의견인 것처럼 밝히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학생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등록금 결정 과정에서도 ‘들러리’

힘이 빠진 총학생회는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학생들의 최대 관심사인 등록금 결정 과정에서도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현행 고등교육법에서는 교직원, 학생, 전문가로 구성된 등록금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학생 측 위원이 전체의 30%를 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학교의 일방적인 등록금 인상을 견제하고 등록금 책정 과정에 학생들의 참여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취지로 통상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가 추천한 인사들이 학생 측 위원으로 참여한다. 제도적 장치는 마련됐지만 문제는 나머지 위원 대부분이 학교 측 인사로 채워지는 탓에 이들이 실질적으로 등록금 결정에 영향력을 미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정진후 정의당 의원실이 전국 333개 대학 등록금심의위원회 구성 현황을 분석한 결과 학생 측 위원 비율은 36.1%였다. 법으로 정한 기준을 간신히 넘긴 수준이다. 매년 3월을 전후해 대부분 대학의 총학생회가 ‘등록금 투쟁’에 나서지만 대학 본부는 학생회보다는 교육부의 눈치를 볼 뿐이라는 것이 대학 전반의 시각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11월을 전후해 각 대학 총학생회가 마주하는 고민도 있다. 다음 해 총학생회장단을 뽑는 선거를 치러야 하는 시기지만 출마 후보자가 많아야 1, 2명 수준인 데다 투표율도 극히 낮아 총학생회 출범 자체가 늦춰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현재 거의 모든 대학은 총학 선거 유효 투표율을 재학생의 50% 이상으로 정하고 있다. 투표율이 50%를 넘지 못하면 연장 투표를 하거나 재선거를 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총학생회장 없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1년을 버티는 경우도 생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투표율이 70%를 넘는 대학이 적지 않았지만 2000년대 이후 거의 모든 대학에서 50%를 넘기는 것이 벅찬 실정이다. 지난해 서울대는 총학생회장 선거 투표율이 50%에 못 미쳐 재선거를 치렀다. 재선거도 투표 기간을 연장한 끝에 가까스로 50%를 넘겼다. 연세대는 2002∼2004년 3년 연속으로 투표율 50%를 넘기지 못해 연장 투표를 했다. 고려대 역시 2006년 투표율 50%를 넘기지 못해 투표 기간을 5일 연장해야 했다.

투표율만 낮아진 게 아니다. 총학생회의 가장 큰 수입원인 학생회비 납부율은 더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다. 과거에는 학생회비가 등록금에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대학들이 하나둘씩 학생회비와 등록금을 분리해 납부토록 하면서 학생회비를 내지 않는 학생이 늘기 시작했다. 학생 상당수는 “나한테 직접 도움도 안 되는데 왜 내야 하느냐”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연세대는 학생회비 자율 납부를 시작한 2013년 1학기 학생회비 납부율이 39.9%였으나 2년이 지난 올해 1학기에는 28.6%로 10%포인트 넘게 줄었다. 학생 10명 중 3명만 학생회비를 낸다는 얘기다. 학생회비 외에 마땅한 수입원이 없는 총학생회는 당장 각종 사업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다. 학생회가 주최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축제 등 행사 규모를 축소하거나 취소하는 경우도 있다.

“경쟁 사회의 그늘… 위상 재정립 필요”

이렇게 대학 자치 조직의 위상이 떨어지면서 ‘상아탑’의 한 축을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도 벌어진다. 지난달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나붙은 ‘성폭행 사과 실명 대자보’가 대표적이다.

지난달 중순 연세대 재학생 A 씨는 같은 대학 후배를 성추했다고 고백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자신의 실명과 학년, 학과 등을 명시해 캠퍼스 곳곳과 페이스북에 게시했다. 실명 대자보로 공개 사과하라는 피해자와 피해자를 돕고 있는 총여학생회 측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정이다.

하지만 대자보가 붙은 이후 피해자 측은 A 씨의 구체적인 과거 이력이 사과문에 담기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총여학생회 소속 학생들이 A 씨의 아르바이트 장소에까지 찾아가 항의했고 가해자인 A 씨는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가해자의 잘못이 분명하더라도 피해자의 고소로 경찰이 조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총여학생회 측이 지나치게 여론재판으로 몰아가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일부 전문가는 총여학생회의 성급함을 지적하고 있다. 박찬성 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은 “대학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는 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실명이 공개된 상황에서는 당초 의도와 달리 논의가 가해자를 겨냥할 수밖에 없다”며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실명 공개는 매우 신중히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결국 학생에게서 멀어지면서 학생회의 발언력이 약해지고, 이 때문에 학생과 대학 본부로부터 소외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가운데 학내 문제 대응마저 논란을 일으키는 상황이다. 대학 사회 안에서 이런 문제를 지켜보고 있는 교수들은 지나친 경쟁이 대학 자치까지 압박하는 현실을 돌아보되 학생회 역시 현실에 맞게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개인주의의 가속화는 현대사회 전체의 특징”이라면서도 “학점 상대평가와 스펙 쌓기로 대학생들을 몰아넣은 결과가 아닌지 기성세대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성인기에 접어들었고 사회에 진입하기 직전인 대학생들의 자치 조직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현실을 사회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학생이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과거와는 상황 자체가 크게 달라졌다”며 “학생들에게 밀착된 이슈를 발굴하는 해외 대학 학생회 등을 참고하면서 총학생회의 위상을 새롭게 만들 시기가 됐다”고 밝혔다. 윤 교수는 학생 사회 전체가 심각한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학생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는 결국 학생회 조직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호경 whalefisher@donga.com·김도형 기자 
#대자보#총학생회#국정화#투표율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