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일제때 발굴 ‘서봉총 유물’ 9점 사라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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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반지-구슬팔찌-금귀고리 등… 중앙박물관, 없어진 것 첫 확인
발굴한 일본인 불법반출 가능성

1931년엔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의 서봉총 유물 조사에서 현재 수장고에 보관돼 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 X자형 무늬 금반지와 민무늬 금반지, 구슬 팔찌(왼쪽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촬영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31년엔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의 서봉총 유물 조사에서 현재 수장고에 보관돼 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 X자형 무늬 금반지와 민무늬 금반지, 구슬 팔찌(왼쪽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촬영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라 왕릉인 서봉총(瑞鳳塚)에서 출토된 금관이 훼손된 사실이 최근 드러난 데 이어 금반지와 구슬 팔찌 등 일부 유물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확인됐다. 서봉총 출토 유물 가운데 일부가 사라진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작성한 ‘경주 서봉총Ⅰ(유물편)’ 보고서와 조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31년 유리건판 사진에 찍힌 △‘X자’형 무늬 금반지 2점 △민무늬 금반지 1점 △구슬 팔찌 1점이 현재 박물관 수장고에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앙박물관은 보고서에서 “X자 문양을 표현한 반지가 (1931년) 사진에서는 존재하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며 “사진을 보면 무문(민무늬)의 금반지는 총 12점인데 현재는 11점만 남아 있다”고 밝혔다. 사진에 등장하는 금팔찌 3점과 은팔찌 4점, 유리 팔찌 2점을 제외한 구슬 팔찌 한 점도 자취를 감췄다. 특히 두 개만 있었던 X자형 무늬 금반지가 모두 사라짐에 따라 화려한 장식을 실물로 확인할 길이 없어졌다.

또 경성제국대 교수와 경성박물관장을 지낸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의 논문에 따르면 ‘가는 고리 귀고리(細環耳飾·세환이식)’ 세 쌍(6점)이 서봉총에서 출토됐다고 적혀 있지만, 현재 박물관 수장고에는 1점만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진으로 실물이 확인된 구슬 팔찌 등 유물 4점과 논문에 언급된 금귀고리 5점을 합쳐 최대 9점의 행방이 묘연한 셈이다.

중앙박물관 측은 “언제, 어떤 경로로 유물이 사라졌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여러 정황상 일제강점기 때 외부로 반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장으로 1926년 서봉총 발굴 과정을 주도한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1954)가 빼돌렸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모로가는 경주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각종 유물을 빼돌린 혐의로 1933년 일본 검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특히 그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 8점을 일본인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에게 팔아넘겼다. 이 유물은 ‘오구라 컬렉션’으로 묶여 있다가 오구라의 아들이 1981년 기증해 현재 일본 도쿄박물관에 있다.

“서봉총 발굴, 1600명이 54일 만에 끝내… 유물 훼손 가능성 알면서도 강행”

“우리가 추정한 기준선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생각 없이 흙을 퍼내는 인부들 때문에 목곽(木槨) 안의 유물이 파괴되거나 교란될 우려가 있었다.”(1927년 ‘사학잡지’ 발표 보고서)

일제강점기 서봉총 발굴을 현장에서 지휘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서봉총 발굴 직후 학회지에 낸 약식 보고서 중 일부다. 발굴 당시 목관과 유물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위 주변에 기준선을 대강 잡고 그 위에 쌓인 봉분의 흙을 한꺼번에 들어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칫하면 인부들의 삽질에 유물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고이즈미는 위험한 발굴을 감행했다. 박진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고분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봉분도 양파껍질을 벗기듯 퇴적층을 파악하면서 조금씩 파내려가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고이즈미가 쓴 약식 보고서와 1986년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서봉총 발굴은 1600여 명을 동원해 불과 54일 만에 마무리됐다. 서봉총뿐만이 아니다. 고이즈미 발굴팀은 1926년 5월 중순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무려 50여 기의 신라고분을 발굴했다. 수십 년 걸릴 발굴을 군사작전을 벌이듯 전광석화처럼 진행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실마리는 그가 손잡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사진)에게 있다. 고이즈미는 보고서에서 “모로가가 진력으로 사이토 총독을 움직여 공식 발굴 허가를 얻게 되면서 우리가 다년간 이루고자 했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썼다. 도굴꾼이었던 모로가는 유구에 대한 정밀 탐색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고분 속 유물을 꺼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실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해외 환수 문화재 28건 중 6건이 그가 빼돌린 것들이다.

모로가가 발굴 비용을 대기 위해 건설업자를 끌어들인 것도 부실 발굴의 화근이 됐다. 당시 경주역에 열차 관리시설을 짓는 공사에 많은 흙이 필요했는데 모로가는 서봉총 발굴을 지원받는 대신 건설업자가 봉분의 흙을 퍼 가도록 했다. 빠른 공사를 원하는 업자들은 발굴을 재촉했다. 실제로 고이즈미는 보고서에서 “영리업자와 공동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로 원칙적인 학술 발굴 방법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적었다.

:: 서봉총(瑞鳳塚) ::

1926년 경북 경주시에서 발견된 신라고분이다. 조선총독부 초청으로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가 봉황이 달린 금관 발굴 작업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스웨덴을 뜻하는 ‘서전(瑞典)’의 ‘서(瑞)’자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명명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서봉총 유물#서봉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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