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美 슈라이너병원 ‘사랑의 인술 16년’ 막내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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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화상-기형 청소년 무료치료… 지자체-병원 손잡고 135명에 혜택
국내 재단-병원이 바통 이어 받아

“가영아! 미안해. 그저 곁에서 지켜보며 하나님께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주렴. 앞으로 남은 수술들을 잘 견뎌 다오. 전처럼 예쁜 모습 되찾기를….”

2004년 11월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슈라이너병원 2층 병실. 몇 시간 후면 여섯 살의 어린 딸을 수술실로 들여보내야 하는 어머니 노미숙 씨(44·충남 공주시)의 병상일기 중 일부다. 당시 슈라이너병원을 취재하러 갔던 기자는 딸의 병상에서 기도하던 노 씨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충청권의 18세 이하 청소년 화상 및 선천성 기형 환자들의 희망이 돼 왔던 ‘사랑의 인술사업’. 혜택을 받은 환자와 가족이 ‘슈라이너의 추억’이라는 카페를 만들 정도로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 사업이 16년 만에 막을 내린다. 사업에 참여한 충청권 지방자치단체들이 국내 치료의 길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 청소년 135명 희망 찾아 준 감동의 인술

사랑의 인술사업은 1997년 심대평 당시 충남도지사가 슈라이너병원과 ‘장애 아동 무료 시술 협약’을 맺으며 시작됐다. 2002년에 충북도, 2003년에 대전시가 동참해 현재까지 135명(충남 86명, 충북 32명, 대전 17명)이 치료를 받았다. 항공료(1000만 원)와 체재비(500만 원)를 비롯해 수술 및 치료까지 1억 원 이상이 드는 비용을 무료로 해 줬다. 당시만 해도 국내의 이 분야 의료 수준은 초보 단계였다. 슈라이너병원은 미국의 성공한 사업가 등이 만든 ‘슈라인 재단’이 운영하는 화상 및 선천성 기형 전문 치료기관.

슈라이너병원의 ‘인술 철학’은 감동적이었다. 의료진은 수술 전에 환자를 찾아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뒤 이야기를 하며 환자를 안정시켰다. 수술에 사용할 주삿바늘을 미리 만져 보게 한 뒤 “아프지 않게 만들었다”고 말해 줬다. 한국인 환자를 위해 한국인 간호사를 채용했고 도서실에는 한국어 서적과 인터넷도 갖춰 놓았다. 수술이 끝나면 한국을 방문해 사후 관리와 재활치료 과정을 확인했다. 당시 프랑크 라봉테 병원장은 “우리는 몸이 불편하지 않으니 (장애인에게) 빚이 많다. 무료 치료는 ‘배려가 아닌 의무’다”라고 말했다.

현지의 충청향우회는 고국에서 온 환자와 가족의 체류를 그림자처럼 도왔다. 공항 영접과 배웅부터 입원하고 수술할 때의 통역까지 도맡았다. 아파트에서 기거하는 환자와 가족을 수시로 찾아 시장을 함께 가고 주말이면 유원지나 영화관으로 안내했다. 당시 충청향우회장이던 이창건 씨는 “환자로 온 아이들에게서 고향을 느낀다”고 했다.

○ 새로운 파트너십으로 국내 치료 길 열어

사랑의 인술사업은 2002년경에도 위기를 맞았다. 슈라이너병원 측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인 만큼 좀 더 어려운 나라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무료 치료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충남도는 아직은 무료 치료가 절실하다고 보고 당시 부지사이던 류철희 씨를 ‘특사’로 보내 궁핍한 도내 장애 아동들의 실태를 담은 비디오를 틀어 주면서 유예를 호소했다. 당시 동행했던 이건휘 충남지체장애인협회장은 “비디오를 보고 병원이 눈물바다를 이뤘다. 오히려 병원 측이 더 많은 환자를 받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이 사업이 이번에 중단되는 것은 국내 의료 환경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치료비도 저렴해졌고 무료 치료를 후원하는 재단도 등장했다. 한국은 OECD 회원국인 만큼 외국의 무료 진료에 계속 기댈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충남도는 국내 최대의 화상치료 후원 재단인 베스티안화상후원재단 및 이 분야의 높은 치료 기술을 갖춘 건양대 또는 단국대병원과 협약을 맺어 관내 환자의 치료를 돕기로 했다. 대전시는 베스티안화상후원재단과 이미 협약을 맺은 상태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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