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땅값 때문에… 서울권 중증외상센터 표류

  • 동아일보

버스에 치인 17세 여고생이 병원에 실려 왔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목에는 커다란 파편까지 박혀 있었다. 하지만 병원에선 남은 중환자실이 없다고 난색을 표시했다. 가까스로 병실을 확보했더니 이번에는 다른 수술 때문에 당장 수술할 의사가 없었다.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소녀는 구급차 안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올해 방송된 드라마 ‘골든타임’의 한 장면이다. 드라마 속 얘기거나 의료시설이 열악한 지방의 현실만은 아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외상환자가 발생했을 때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중증외상센터’가 없기는 서울도 마찬가지다. 외상센터가 들어설 계획인 국립중앙의료원 이전 사업이 보건복지부와 서울시의 ‘땅값’ 갈등 속에 계속 지연되면서 수도 서울에서 정작 중증외상환자를 제때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중증외상센터는 산업재해, 교통사고, 추락 등으로 중증외상환자가 발생했을 때 언제나 병원 도착 즉시 응급수술이 가능하고 외상전용 병실 및 수술실, 장비, 전문 인력을 갖춘 의료시설이다. 국내에는 아직 한 곳도 없다.

서울은 기존 대형의료기관에서 외상환자를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서길준 대한외상학회장(서울대 응급의학과 교수)은 “서울대병원만 해도 예약이 꽉 차 있어 수술실과 중환자실에 여유가 없을 때가 많고 다른 병원들도 마찬가지”라며 “암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는 많지만 외상환자를 전담할 수 있는 경험 있는 의사는 전국에 이국종 아주대 교수 등 10여 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외상으로 인한 사망자 가운데 적정한 진료를 받았을 경우 살 수 있었던 ‘예방가능 사망률’은 2010년 35.2%로, 미국 일본의 10∼15%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이다.

이에 따라 정부도 외상센터 건립을 서두르고 있다. 복지부는 1일 인천 가천대 길병원 등 5개 병원을 권역외상센터로 선정했고, 2015년까지 시도별 1곳씩 17개를 설치할 계획이다. 서울지역에는 중구 을지로 국립중앙의료원이 서초구 원지동으로 신축 이전할 때 권역외상센터를 함께 짓기로 했다. 복지부는 6000억 원을 들여 연면적 4만3466m²(약 1만3200평), 950병상 규모로 신축 이전하고 이때 일부를 250병상 규모의 국가중앙외상센터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2003년부터 추진된 이전 작업은 복지부와 서울시가 땅값을 놓고 싸우면서 진척이 안 되고 있다. 당초 서울시가 추모공원 건립을 위해 매입해 놓은 땅의 일부를 병원 용지로 내놓으면서 “시세대로 땅값으로 915억 원을 달라”고 하자 복지부가 “매입할 때 금액인 600억 원만 주겠다”고 버텨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 최근에야 “감정평가를 통해 가격을 산출하자”고 합의했지만 평가기관 선정, 평가방식 등을 놓고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아직 을지로 현 용지도 팔지 못하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이후 서울시가 ‘병원을 옮기더라도 현 용지에 다른 공공의료시설을 짓자’고 주장한다”며 “그렇게 하면 민간 사업자에게 제값을 받고 땅을 팔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병원 이전으로 소외계층의 의료 공백이 생겨선 안 된다”며 “이전 재원 조달은 복지부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맞섰다.

당장 이전 계획이 추진되더라도 용지 매각, 이전 준비, 건물 신축 등까지는 5년이 걸린다. 자칫 전국에서 서울에만 외상센터가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국립중앙의료원 관계자는 “우선은 현 용지의 물류창고를 개조해 임시로 외상센터 시설을 만들고 인력 양성, 경험 축적 등의 준비를 할 것”이라며 “정상 가동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이전 작업이 확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중증외상센터#수도권#외상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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