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붕어빵이 이렇게 비싸?” 욕하던 손님들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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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매출 92억 국내 첫 붕어빵 카페 장건희-소영 남매의 성공 스토리

나를 명품 붕어빵으로 만들어준 장건희(오른쪽) 소영 씨 남매. 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붕어빵카페 ‘아자부’에서 포즈를 취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나를 명품 붕어빵으로 만들어준 장건희(오른쪽) 소영 씨 남매. 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붕어빵카페 ‘아자부’에서 포즈를 취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붕어빵 주제에…. 한 개 3000원은 너무 비싸잖아.” 날 처음 본 사람들은 대개 코웃음부터 쳤다. 심지어 화도 냈다. “얼마나 맛있기에…”라며 지갑을 연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오랫동안 우리 ‘붕어빵 종족(種族)’은 길거리에서만 팔렸고, 추운 겨울철에 주전부리를 하거나 잠시 허기를 달래는 용도였다. 가격은 서너 개에 1000원 정도였다. 한두 개 덤이 없으면 섭섭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 개에 2000∼3000원인 내가 ‘변종’으로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비싸다고 욕했던 사람들이 매장을 다시 찾았다. 》
○ 100% 국산 팥 고집… ‘명품’으로 승부

이상했다. 날 사려고 줄까지 섰다. 손님은 1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했다. 2009년 4월 3일, 처음 세상에 태어난 날이었다.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지하 1층 두 평 남짓한 매장에서 나는 하루 새 500만 원어치가 팔렸다. 백화점 측은 식품관 매장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욕하면서 먹는 명품 붕어빵.’ 이때부터 나는 이렇게 불렸다.

나는 ‘아자부’라는 카페에서 만든다. 아자부(麻布)는 원래 일본의 다이야키(조燒き·도미빵)를 처음 만든 도쿄(東京)의 동네 이름이다. 종류는 팥을 비롯해 팥&크림치즈 팥호두 고구마 블루베리크림치즈 말차(抹茶)팥 말차고구마 등등…. 몸값은 개당 2000∼3000원이다. 점원은 주문을 받자마자 175∼180도로 가열된 기계에서 나를 굽는다. 주문한 만큼만 바로 만드는 ‘즉시 생산’이 원칙이다. 미리 구워 놓는 법이 없으니 기다림은 필수다. 굽는 시간은 정확히 7분. 몸통의 좌우를 뒤집는 시각까지 정해져 있다. 타이머가 달린 기계에서 이 과정은 1초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

나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무엇보다 팥 앙금 양이 길거리 붕어빵보다 8배가량 많다. 다이야키처럼 꼬리까지 팥이 차 있다. 내 몸을 구성하는 팥은 100% 한국산이다. 물 좋다는 전북 진안, 전남 영암과 신안의 농가에서 가져왔다. 한국산 팥은 적당히 퍼져 씹는 맛이 부드럽다. 색깔이 검고 잘 안 퍼지는 중국산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국산 팥은 ‘가내수공업’을 거쳐 앙금으로 거듭난다. 서울 성수동과 경기 용인시에 있는 제조공장에서 내 몸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불량 팥은 가차 없이 걸러낸다. 까다로운 검수 작업을 마치면 팥은 가마솥에서 8시간 삶긴다. 합성첨가물이나 방부제는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는다. 오래 둬도 촉촉함이 유지되도록, 반죽에도 계란 밀가루 우유 외에는 물 한 방울도 섞지 않는다. 내가 ‘붕어빵 주제에’ 비싸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다.

[채널A 영상] 붕어빵 한 개에 2500원? 간식도 ‘양극화’

○ 프로야구 선수-식품영양학 전공 남매의 도전

명품 붕어빵인 나를 탄생시킨 이는 프로야구 선수 출신인 장건희 씨(41)와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소영 씨(32·여) 남매다. 2008년 소영 씨가 카페를 차리겠다고 하자, 오빠 건희 씨는 걱정이 됐다. 그는 너도나도 차리고 본다는 커피전문점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차별화된 사업 아이템이 필요했다. 건희 씨는 길을 걷다가 불쑥 ‘왜 여름에 호떡은 팔면서 붕어빵은 안 팔까’ 하는 의문을 느꼈다. 그는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을 찾아가 물어봤다. 이유는 단순했다. 여름이 되면 팥이 금세 쉬기 때문이었다.

‘냉방시설을 갖춘 실내에서 붕어빵을 팔면 되겠구나.’

건희 씨가 내린 결론이었다. 문제는 ‘어떻게’였다. 야구를 그만두고 대학에서 스포츠 경영학을 가르치던 건희 씨에겐 너무 막연한 물음이었다. 그가 사전조사를 하다 알게 된 사실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은 물론이고 팥으로 요리를 하는 고급 음식점조차 중국산 팥을 쓴다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여기에 길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즈음 붕어빵이 일본의 다이야키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불현듯 어릴 적부터 얘기만 들어왔던 이모 정금순 씨(77)가 떠올랐다.

건희 씨의 이모는 1960년 후반 일본으로 건너가 100년 전통의 다이야키 가게 ‘나니와야’에서 일했다. 한때 도쿄 이케부쿠로(池袋)역에서 자신만의 가게도 열었다. 지금은 한국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다. 남매는 이모를 찾아갔다. 이모는 두 가지를 얘기했다.

“좋은 맛은 좋은 원재료에서 나온다.”

“고객은 영리하다. 좋은 것을 반드시 알아본다.”

남매는 이모로부터 다이야키 만드는 비법을 전수받았지만, 그대로 베낄 수는 없었다. 자존심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다이야키는 밀가루와 물, 찹쌀을 배합해 반죽했지만 반죽이 얇아 씹는 맛이 없었다. 홋카이도(北海道)산 팥은 한국인의 입맛에 너무 달았다.

‘다이야키와 반대로 가자. 일본산보다 달지 않은 한국산 팥을 쓰자. 반죽 피를 넉넉하게 해 씹는 맛을 느끼게 하자.’

남매는 여기에 길이 있다고 확신했다.

○ 퇴짜… 오기… 노점 아닌 백화점으로

팥과 반죽의 밑그림을 그린 남매는 본격적인 나를 개발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머릿속에 그린 그림을 현실에서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식품업종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기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남매는 제빵업계 전문가로 알려진 S호텔 K 과장을 찾아갔다. K 과장에게 “팥을 끓이고 반죽을 만드는 것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거액의 개발비도 제시했다. K 과장은 손사래를 쳤다. “팥을 처음부터 끓여 본 경험이 없다. 더구나 사업성이 없다”고 했다. 국가대표 제과기능장인 W 씨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남매는 팥을 구하는 것부터 반죽, 굽는 기계를 만드는 것까지 직접 해야 했다. 건희 씨의 아내와 처이모도 합류해서 힘을 보탰다.

2009년 2월 건희 씨는 신세계백화점 식품관 상품개발자인 임춘수 과장을 찾아갔다. 손에는 샘플 사진 한 장을 쥐고 있었다. 시장이 아닌 백화점에서 팔 수 있는 명품 붕어빵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호기롭게 제안했지만 임 과장은 난색을 표했다. 당시 상황을 임 과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평소 다이야키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일본인이 부러웠다. 우리도 그런 상품을 만들었으면 했는데 건희 씨가 찾아왔다. 하지만 샘플 한 장으로 입점을 결정하기란 어려웠다.”

건희 씨는 오기가 생겼다. 그때부터 3개월간 부엌에 있는 식탁에서 붕어빵을 구웠다. 식어도 딱딱하게 굳지 않고 촉촉함을 유지하려면 우유만이 해답이었다. 그의 가족들조차 “비싼 우유를 써서 어떻게 원가를 감당할 거냐”며 반대했다.

더 큰 문제는 두꺼운 반죽을 타지 않게 구울 수 있는 붕어빵 기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설계도를 보고 업체들이 만들어 왔지만 반죽은 익지 않고 겉이 타기만 했다. 마음도 함께 타들어갔다. 문제는 가스가 아닌 전기를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신세계백화점 식품관에 입점하려면, 가스가 아닌 전기히터가 달려 있는 기계를 만들어야 했다. 백화점 안전 규정상 가스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식탁 위에 기계를 놓고 수백 번의 시험을 한 끝에 적당히 익으면서 반죽이 타지 않는 적정 시간과 불의 세기를 연구했다. 기계를 4번이나 다시 설계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드디어 건희 씨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내가 완성됐다. 2009년 4월이었다.

○ 日처럼 100년 기업을 꿈꾼다

‘아자부’는 4월 임시 입점한 후 9월 1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모든 것은 순탄했다. 입소문만으로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줄을 서서 먹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백화점 두 평 매장에서 시작한 아자부는 대치동, 서래마을, 압구정동, 분당 정자동 등 강남 지역 고급상권으로 뻗어갔다. 김포와 신촌, 삼청동 등에 문을 연 것을 비롯해 4월엔 부산 센텀시티에 입점한다. 매출액은 2010년 16억6800만 원에서 지난해 92억1000만 원으로 늘었다.

장사가 잘되니 건희 씨 남매에게는 동업 제의가 쏟아졌다. 전국 휴게소들이 나를 입점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시장에 진출해 보자는 대형 연예기획사도 있었다. 하지만 남매는 모두 거절했다. 이들의 목표는 사업 확장이 아니었다. 얼마 전 한 식품업체가 붕어빵을 출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러 업체가 나로 인해 생겨난 명품 붕어빵 시장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들은 나보다 저렴한 가격을 제시할 것이다. 명품 붕어빵 시장에 저가 경쟁이라니…. 암 안 될 이야기이고말고.

나는 확신한다. 나와 똑같은 재료를 쓴다면 나보다 싼 붕어빵이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을. 장씨 남매인들 왜 그런 유혹을 받지 않았겠는가. 사실 재작년 우유파동 때는 남매도 ‘우유의 양을 좀 줄여볼까’ 하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남매가 유혹을 물리치고 원칙을 고집한 덕에 나는 명품 붕어빵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건희 씨 가족이 “아자부를 100년 역사를 가진 기업으로 키우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다. ‘고작 붕어빵을 가지고…’라며 비웃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건희 씨 가족을 믿는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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