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의 명문 예술고인 안양예고가 한 여교사 문제로 내홍을 앓고 있다. 학부모들은 ‘문제 교사’라며 내쫓으려 하는데 학생들은 “선생님을 구해 달라”며 구명운동을 벌이는 상황이다. 학생들의 반대에도 학교 측은 “문제가 커질 수 있다”며 그 교사의 수업을 중단시키고 해임 절차를 밟고 있다. 안양예고에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부실교사 vs 헌신교사’
사건은 두 달 전 이 학교 음악과 2학년 학부모 몇 명이 담임교사 A 씨를 부실교사로 지목하면서 시작됐다. 영어를 가르치는 A 교사가 수업용 유인물을 단 한 건도 나눠주지 않고 학생들이 수업 중 잠을 자도 가만 놔둔다는 게 학부모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A 교사가 레슨에 가야 할 아이들을 학교에 잡아두고 자습을 시키는 등 음대 준비에 집중해야 할 아이들을 배려하지 않았다”며 다른 학부모들을 상대로 “A 교사를 교단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에 동조한 학부모 10여 명은 23∼25일 학교 앞에서 “A 교사를 파면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주도한 학부모 대표 B 씨는 “딸이 담임인 A 교사에 대해 ‘수업이 부실하다’며 자주 불만을 토로했다”며 “넉넉지 않은 형편에 일반 학교보다 몇 배나 비싼 수업료를 내고 있고, 영어는 주요 입시과목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A 교사 학급 학생들 상당수와 최근 1, 2년간 A 교사가 담임을 맡았던 학생들은 “선생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다”며 시위 중단을 요청했다. 학부모들의 민원을 접수한 학교 측이 A 교사의 담임직을 박탈하고 사직을 권고하는 등 해임 절차를 밟자 학생들은 인터넷에 ‘우리 선생님을 구해주세요’라는 글을 올리는 등 구명운동에 나섰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해당 학급 간부와 학생들, A 교사의 수업을 듣는 학생 30여 명을 취재한 결과 문제를 제기한 학부모들의 주장은 학생들의 생각과 크게 달랐다. 또 A 교사 학급 학생 40명 중 본보가 접촉한 24명은 모두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는 것을 반대한다”고 답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매 과를 마칠 때마다 문법과 단어를 정리한 유인물을 두 번씩 나눠줬고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이 있으면 깨워서 뒤로 내보낸 뒤 필기를 열심히 하면 다시 앉게 했다”고 입을 모았다. 성적이 상위권인 한 학생은 “수업내용에 알맹이가 있고 다른 영어수업과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A 교사가 레슨에 늦게 보낸 것에 대해선 “선생님이 학기 초 수업 태도가 안 좋은 몇 명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방과 후 2, 3번 자습을 시킨 것”이라며 “하지만 선생님이 레슨의 중요성을 이해한 뒤론 그런 일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에 응한 학생들 중엔 A 교사에게서 도움을 받은 경우도 많았다. 지난해 A 교사가 담임을 했던 한 학생은 “집에 빚이 많아 사채업자들한테 걸릴까 봐 학교를 며칠 결석했는데 선생님이 ‘누가 와도 네 학생부는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며 위로해줬고 교내 장학금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말했다. 한 남학생은 “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둬야 할 뻔했는데 선생님이 장학금을 챙겨주신 덕분에 계속 다닐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누구를 위한 교사 퇴출인가
학부모들은 9월 해당 학급 학생들을 한 영어학원으로 불러 중국음식을 시켜주며 A 교사에 대한 불만사항을 물어봤다. 그 자리에서 일부 학생은 “수업이 재미가 없다” “수업이 너무 빡빡하다” 등의 의견을 냈다. 하지만 한 학부모가 실제로는 미혼인 A 교사에 대해 “(너희) 선생님은 ‘돌싱(돌아온 싱글·이혼한 남녀)’이다”란 말을 하며 A 교사를 깎아내리자 한 학생은 “어머니들이 이렇게 모여서 선생님을 부당하게 몰아내려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며 자리를 떴다고 한다. A 교사가 지난달 16일 교단에서 떠난 뒤 해당 학급 학생들이 동요하자 학부모들은 교실을 찾아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며 다독이기도 했다.
음악과 2학년 학생 중 대다수는 A 교사의 퇴출에 반대하지만 극히 일부는 찬성하면서 학생들 간에도 갈등 기류가 생기고 있다. 이 학급의 한 학생은 “예전엔 서로 격의 없이 대했던 친구들인데 요즘엔 뭔가 보이지 않는 장벽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인 A 교사는 “학기 말이라 실기평가와 기말시험이 있어 아이들에겐 공부에 집중해야 할 중요한 시기인데 이런 상황 때문에 혼란을 겪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며 “지난 19년간 늘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한 게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동료 교사는 “치맛바람에 교권이 침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섣불리 나섰다간 A 교사를 감싸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 마땅히 도와줄 길이 없다”며 “요즘은 초등학생들이 교사한테 ‘우리 엄마한테 말해서 선생님 자를 거예요’라며 겁을 주는 일도 자주 있다”고 말했다.
학부모 대표 B 씨는 “우리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A 교사가 3학년에도 우리 아이들 담임을 맡게 될까 봐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막아야 했다”며 퇴출운동이 불가피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학교 측은 “한 교사가 같은 과 학생들을 연이어 다음 학년까지 맡는 건 거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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