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제일은행 파업 44일째… 설악산 아래 현장 가보니

  • 동아일보

“파업 승리해도 은행 미래 어두워”…
불신 - 불안에 지쳐가는 노조원들

아이까지 파업현장에… 9일로 44일째 원정파업 중인 SC제일은행 노조원 2500여 명이 강원 속초시 설악동 자락에서 파업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를 데려온 한 여성 조합원이 동료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속초=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아이까지 파업현장에… 9일로 44일째 원정파업 중인 SC제일은행 노조원 2500여 명이 강원 속초시 설악동 자락에서 파업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를 데려온 한 여성 조합원이 동료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속초=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8일 오후 5시 반 강원 속초시 설악동 C관광지구 주차장은 평일이어서인지 텅 비어 있었다. 차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느덧 인원은 2000명 넘게 늘어났다. 슬리퍼와 반바지 차림의 이들은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서의 여유로움이나 여행의 들뜬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SC제일은행 조합원들의 파업집회 현장이었다. 집행부의 선창에 맞춰 조합원들이 외친 구호는 설악산 자락에 부딪쳐 메아리로 돌아왔지만 태풍 ‘무이파’가 몰고 온 매서운 바람에 이내 묻혀버렸다.

○ ‘휴양 파업’이 아니라 ‘피난 파업’

9일로 파업 44일째를 맞은 SC제일은행 조합원 2500여 명은 설악산 입구에 있는 20개 숙소에 흩어져 생활하고 있다. 이들이 묵고 있는 모텔은 겉보기에도 금방 쓰러질 것처럼 낡았다. 노조 집행부 관계자는 “피서철이라 일반 숙박객에게 밀려 평소 손님이 거의 찾지 않는 숙소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자가 들어간 방도 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합원들은 보통 한 방에 5, 6명씩 지낸다고 했다. 한 조합원은 “지난주 있던 곳은 천장에서 비가 새고, 곰팡이 핀 벽지가 벗겨져 있었다”고 전했다. 김재율 노조위원장은 “장기 파업에 대비해 최대한 절약해야 한다”며 “이곳으로 옮기면서 일주일 숙식비가 2억 원으로 종전보다 1억 원가량 줄었다”고 설명했다.

9일 오전, 등산 모자와 작은 배낭을 둘러 멘 노조원들이 관광지구와 연결된 등산로 입구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돼서야 돌아온 이들은 구름 낀 날씨에도 셔츠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곳에서 조합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책이나 TV를 보는 것 말고는 등산이나 배드민턴 정도가 전부다. 파업 초기에는 봉사활동 등 프로그램이 많았지만 2주 전부터 폭우가 쏟아지는 등 날씨가 좋지 않아 단체행동마저 힘들어졌다.

○ 아프고 경제적 부담도…내부 반발


몸이 성치 않은 조합원도 속출하고 있다. 병원 진료를 원하는 조합원들이 점점 늘어 하루 30∼40명에 이른다. 현지 병원에서 치료가 어렵거나 약을 구할 수 없는 조합원들은 서울 병원을 오가야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한 여성 조합원은 “부인과 병이 생겨 서울 병원에 가야 하는데 노조에서 ‘더 큰 병에 걸린 사람도 있는데 자제해 달라’며 부탁해와 부담이 된다”고 털어놨다. 숙소를 오갈 수 있는 2개의 다리는 조합원들이 24시간 지키며 통제하고 있다. 부득이한 이유가 있을 때만 허가를 받고 나갈 수 있다.

경제적 부담도 조합원들의 목을 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따라 파업기간 중 임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당장 이번 달부터는 100만 원가량 월수입이 준다. 40대 한 조합원은 “주택담보대출 이자에 아이들 학원비까지 내야 하는데 걱정”이라며 “주말에 집에 가면 아내가 말은 안 하지만 속이 타들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 조합원은 “경제적 부담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고객이 떠나가는 판국에 언제까지 이렇게 죽치고 있을 수 없다”고 답답한 심정을 호소했다. 일부 조합원은 파업을 풀고 업무에 복귀해 태업을 하거나 일주일 중 1, 2일만 파업하는 방안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SC제일은행에 따르면 8일에만 조합원 30여 명이 속초로 돌아가지 않고 현업에 복귀했다. 대부분 본점 부서나 고액자산가를 상대하는 프라이빗뱅킹(PB) 소속 직원들이었다.

○ 파업 승리한들 잃은 것도 많아

8일 밤 12시를 넘겨 오전 3시가 다 됐지만 숙소 곳곳에서는 잠들지 못하는 조합원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비쳤다. 지점장 및 계약직 직원들과의 관계는 파업에 승리한다고 해도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명문대를 졸업한 입사 2년차 한 조합원은 “더 이상 회사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며 “외국계 은행 들어갔다고 부러워하던 주변사람들에게 너무 부끄럽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이미 입사 1년차 조합원 2명이 회사를 그만두는 등 젊은 직원 중에는 이직을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SC제일은행 노사는 가장 큰 쟁점이던 성과급제 도입에 대해서는 의견 차를 좁혔지만 전 직원 후선발령제도와 상시명예퇴직제도 폐지를 두고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있다. 많은 조합원들 눈에는 노사 어느 쪽이 이기느냐를 떠나 망가져 가는 조직을 추스르고 떠나가는 고객을 붙잡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어려 있는 듯했다.

속초=김철중 기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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