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제주의 한 고등학교 2학년 ○반. 정규수업이 끝나고 보충수업이 한창이었다. 보충수업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전교 5∼10등을 오가는 김모 군(17)이 슬쩍 일어나더니 짝인 이모 군(17)에게 말했다. “몸이 아파서 나머지 수업은 못 들을 것 같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병원에 가야겠어.”
김 군이 조퇴하고 난 직후 이 군은 다음 수업에 필요한 교재를 기숙사 방에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기숙사에 들러 컴컴한 복도를 지나던 이 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병원에 간다던 김 군의 방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게 아닌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 본 이 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 군이 자신의 책상에서 ‘폭풍 공부’(공부를 심하게 열심히 한다는 뜻의 신세대 은어) 중이었던 것.
김 군은 왜 거짓말을 하고 기숙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을까? 다음은 목격자 이 군의 추측.
“뻔해요. 중간고사가 코앞이니까, 필요한 수업만 골라듣고 혼자 시험 공부하러 간 거죠. 따로 공부한다는 걸 들키기 싫으니까 친구들한테까지 거짓말했겠고…. 특히 수준별 수업인 보충수업은 성적 좋은 학생들이 모여 있어 서로 어떻게, 얼마나 공부하는지에 대해 민감하거든요. 얄미워 죽겠어요!”》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이라 했던가. 중고교 시험 기간엔 성적 상위권을 중심으로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학생들의 거짓말이 난무한다. 밤늦게까지 코피 나게 공부한 사실을 숨기려고 “어제 책 한 번 못 펴보고 잠들었다”며 호들갑 떠는 것은 다반사. “(짐짓 모르는 체하며) 우리 시험범위 어디까지야?” “이번 시험은 포기했어. 대충 볼 거야”도 대표적이다. 모두 공부 안 한 척 친구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다.
최근 대학입시에서 내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이런 ‘깜찍한’ 수준의 거짓말은 치밀한 ‘작전’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다. 빽빽이 푼 문제집은 집에 두고 학교에선 뻣뻣한 새 문제집을 들고 다니거나, 야밤 공부 중 친구에게 전화가 오면 방금 전까지 자고 있던 것처럼 맥없는 목소리로 받는 등 각종 기발한(?) 아이디어가 동원된다. 제대로 필기한 노트와는 별도로 건성건성 필기한 노트를 준비해 친구가 필기를 보여 달라고 할 때 이 노트를 건네기도 한다.
온라인을 이용한 ‘합동작전’도 이뤄진다. 상위권인 고3 서모 양(18·서울 양천구). 그는 얼마 전 과제를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켠 여동생에게 “내 ID로 온라인 메신저에 로그온 하라”고 주문한 뒤 책상으로 돌아갔다. 메신저를 켜 두면 마치 컴퓨터를 하며 놀고 있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자정이 넘은 시간, 한창 수학문제 풀기에 집중하고 있는 서 양을 향해 동생이 외쳤다.
“언니! 언니 친구가 공부 많이 했냐고 메신저에서 물어보는데?” 서 양의 대답. “그래? 지금 인터넷으로 ‘무한도전’ 재방송 보고 있다고, 정신 차리고 공부해야 되는데 미치겠다고 답장해. 나인 척하는 거 들키면 안 된다!”
시험공부를 얼마 못했다고 해서 혼자 죽을 순 없다. 친구 공부를 방해하는 일명 ‘물귀신 작전’도 있다.
부산의 한 외국어고 1학년 송모 군(16). 쉬는 시간 졸음을 물리치려 MP3플레이어로 최신가요를 듣던 그의 눈에 라이벌 친구가 공부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송 군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친구에게 다가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예쁘니!”라며 아이돌 그룹 ‘포미닛’의 최신곡 후렴구를 열창했다. 친구는 “하지 말라”고 짜증을 내다가 이내 포기한 듯 송 군의 열창에 동참했다.
송 군은 “수시 모집인원이 확대되고 내신 성적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친구들 간의 견제가 더 심해진 것 같다”면서 “친구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해 거짓말하거나 방해 작전을 펼치는 모습이 씁쓸할 때도 있지만 좀 더 나은 대학에 가려는 욕심은 어쩔 수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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