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남고-주제설정부터 논문발표까지 학생이 연구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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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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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로 실험 진행해 연구결과 보고,탐구대회-연구활동이 곧 수업과정
“성적 좋다고 연구 잘하지는 않아”

《역량기반 교육은 유럽 국가와 영연방 소속이었던 국가(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는 반면 국내에선 아직 낯선 개념이다. 전문가들 사이에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입시 체제가 있는 한 역량기반 교육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 수업이 학생 주도 형태로 바뀌면 수능 대비를 위한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학교에서 문제풀이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결국 학생이 학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국내에서 역량기반 교육은 아직 시기상조이고, 도입하더라도 초등학교에서나 가능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역량기반 교육현장을 가다


○ 가장 낙후된 학교에서 ‘공교육의 역할 모델’로


부산의 낙후 지역인 영도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부산남고는 ‘역량’이란 말조차 생소했던 2007년부터 미래역량 중심 교육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해 자율학교로 탈바꿈한 부산남고에 부임한 박경옥 교장은 “처음에는 폐교 직전 상태의 학교였다”고 말했다. 학력은 부산 시내 일반계고 중 최하위권이었고 교통이 불편해 모든 교원들이 기피하는 학교였다. 학생 대다수는 저소득층이었고 우수한 중학생은 다른 지역으로 이탈했다.

2007년부터 박 교장과 교원들은 ‘좋은 학교’로 소문난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노하우를 배우기 시작했다. 박 교장은 “정말 잘하는 학교들이 많았지만 우리 학교 여건에서는 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부산에서도 평균 이하인 학생 자원으로 학력 향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박 교장은 수능 위주의 수업을 바꾸기로 했다. 이 학교 학생들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학습 역량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점차 학교는 학생과 학부모의 신뢰를 얻었다. 지원율 미달 학교에서 경쟁률이 3 대 1에 이르는 학교가 됐고 역량을 길러주는 부산남고의 노하우를 배우겠다며 200여 개 학교에서 찾아왔다.

○ 연구활동 통해 학습역량 기른다

학습역량을 길러준다는 부산남고의 교육 방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트 사이언스 탐구대회’와 ‘과제연구’다. 이 학교 학생들은 1학년 때 모두 아트 사이언스 탐구대회에 참가한다. 방과 후 시간을 이용해 학생들은 조별로 탐구 주제를 정하고 실험을 한 뒤 결과 보고서를 제출한다. 1학년 초 한 달 내내 부산남고 학생들은 무슨 연구를 어떻게 해볼까 생각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셈이다. 조별 연구과제에 따라 지도교사를 지정해 도움도 받을 수 있다.

2학년부터는 연구가 정규수업이 된다. 학생들은 2학년 1학기에 주당 2시간씩 과제연구라는 수업을 듣는다. 3월에 연구 주제 기획부터 시작해 6월에 연구를 마치고 논문까지 써내는 수업이다. 학기 말에는 논문 발표대회를 열어 우수성과를 시상한다.

교사들도 처음에는 평범한 학생들이 연구를 주도적으로 해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진행했다. 올해 1학기에 최우수상을 받은 팀은 ‘피겨스케이팅에 숨은 과학적 원리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그 외에도 ‘태종대 발전방향 연구’ ‘공부 잘하는 학생의 특성에 관한 연구’ 등 학생들의 다양한 관심사가 연구로 나타났다.

과학 담당인 장운태 교사는 “다양한 아이들이 다양한 논문을 써내는 것에 나도 놀랐다”며 “낮은 수준의 학생들도 자기 연구의 결과물을 모은다는 것에 자부심과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장 교사는 “시험성적이 높다고 해서 연구를 잘하는 것은 아니고 낮다고 연구를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학교의 역량기반 교육과정은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된 이후 대학 입시에서 큰 효과를 봤다. 백영선 교사는 “다른 학교 교사들은 입학사정관제 추천서를 써줄 때 쓸 거리가 없다고 고민을 하는데 우리는 쓸 게 많다”며 “아이들마다 연구를 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해결방법이 다 다르다. 실험하는 광경만 잘 지켜봐도 아이의 특성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2006년 부산남고는 서울지역 대학에 단 한 명도 진학시키지 못했다. 부산대에도 4명만 진학시켰다. 하지만 2009년에는 서울대를 포함해 서울지역 대학에 10명, 부산대에는 17명을 진학시켰다. 박 교장은 “우리가 역량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바꾼 이후에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됐는데 결과적으로 우리 학생들에게는 유리해졌다”며 “서울지역 대학에 진학한 학생 대부분이 입학사정관제로 합격했다”고 말했다.

○ “체험으로 배워야 잊혀지지 않아”


“그래도 수능에 대비하려면 전통적인 수능 대비식 수업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부산남고 교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백 교사는 “수능 문제는 암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문제도 잘 풀 수 있다”며 “학습 역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조건 외워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고 말했다.

‘체험으로 배운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학교 교육방침의 핵심이다. 연구 대회와 과제연구 수업은 물론 일반 수업에서도 통합 체험학습이 많다. 예컨대 지리, 역사, 과학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부산 영도에 지역 탐사를 나가는 것이다. 해안의 지리적 특성 탐구와 부산지역 역사기행, 생물 탐사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 수학여행도 평범하지 않다. 학생들이 그룹을 지어 탐방 계획을 세우고 지도교사와 함께 현장으로 떠난다.

모든 활동이 교사 위주가 아닌 학생 위주로 구성돼 있다. 활동은 모두 기록으로 남기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은 졸업할 때쯤이면 수백 쪽의 개인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다. 백 교사는 “여행도 직접 테마를 정하고 먹을 것 잠잘 곳을 모두 스스로 결정하도록 한다. 널려 있는 정보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런 것이 모두 역량기반 교육인 셈”이라고 말했다.

박 교장은 이러한 학교의 변화에는 교사의 역량 강화가 가장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교장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해서는 안 된다. 방향만 제시하고 교사들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며 “교사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교장은 “이런 방식의 수업을 하려면 교사가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행정전담 인력 확충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부산=남윤서 기자 bar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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