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사재 10억 털어 다문화청소년재단 만든 한용외 前삼성사회봉사단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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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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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로부터 받은 삶, 베푸는 삶으로 갚는 건 당연하죠”

다문화 청소년 역사-문화 도서지원 등
한국사회에 뿌리내리는 ‘소통’문제 주력
돈 버는 일만큼 쓰는 일도 어렵더군요
요즘 주변에 재산기부 희망자 늘어 다행

“지금까지의 삶은 남들로부터 받은 삶이니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남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한용외 전 
삼성사회봉사단 사장. 11년 동안 기업사회공헌 분야에서 일해 온 그는 “돈 버는 일도 어렵지만 쓰는 일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는 현업에서 익힌 전문성을 살려 인생 제2막의 주제를 ‘나눔’으로 잡았다고 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지금까지의 삶은 남들로부터 받은 삶이니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남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한용외 전 삼성사회봉사단 사장. 11년 동안 기업사회공헌 분야에서 일해 온 그는 “돈 버는 일도 어렵지만 쓰는 일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는 현업에서 익힌 전문성을 살려 인생 제2막의 주제를 ‘나눔’으로 잡았다고 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인터뷰 약속 몇 시간을 앞두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왔다. ‘보내주신 기사들은 잘 보았습니다. 인터뷰하신 분들이 모두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자격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짧으면서도 정중한 거절이었다. 그동안 기자가 썼던 인터뷰 기사를 보고 부담을 가진 듯했다. 그는 한용외 전 삼성사회봉사단 사장(63)이다. 최근 사재 10억 원을 털어 다문화가정청소년복지재단(사회복지법인 인클로버)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청했었다. ‘어떻든 비워둔 시간이니 차나 한 잔 하자’며 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에는 사진관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형 플래시, 인화기 등이 놓여 있었다. 작은 스튜디오 같았다. 다문화가정의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마련한 장비들이라고 했다. 벽에는 독도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는 4년 전 사진에 입문해 최근 전시회까지 열었다. 책상 한쪽엔 논문자료들이 수북했다. 박사학위 논문(사회복지학) 마무리 작업 중이라고 했다.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바쁘게 살고 있는 일상이 한눈에 들어왔다.》“별것 아닌 일(재단 설립)인데 과장되어 비칠까 걱정”이라는 게 인터뷰를 망설인 이유였다. ‘무엇보다 은퇴 후 봉사의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고 하자 어렵사리 입을 뗐다.

“우리 세대가 자라던 시절, 누군들 어렵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저 역시 고비 고비마다 귀인(貴人)들을 만났습니다. 학비가 없어 초등학교도 못 갈 정도로 가난했는데 집주인이 학비를 대줘 들어갔고 경북중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초등학교 은사가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줬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제일합섬 경산공장에서 일할 때는 폐결핵에 걸렸는데 당시 상사가 물심양면으로 돌봐줘서 고비를 넘겼고요.”

그는 “돌이켜보면 모두 남들로부터 받은 삶”이라면서 “이제 조금이라도 사회에 돌려주는 게 당연한 일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 감사팀에서 삼성복지재단 감사를 한 것이 복지 업무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한 전 사장은 은퇴 전까지 총 11년간 삼성재단총괄 일을 맡아 기업 사회공헌 분야를 전담해 왔으니 ‘돈 쓰는 일 전문가’라 할 만하다. 현역 시절 전문성을 살려 은퇴 후 삶까지 선택했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삼성복지재단 일을 시작하면서 그의 생각은 ‘어떻게 돈을 벌까’에서 ‘어떻게 쓸까’로 바뀌었다.

―돈 쓰는 거야 쉬운 일 아닌가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실제로 경험해 보니 버는 일만큼 쓰는 일도 어렵더군요. 버는 쪽에서 보면 좋은 서비스, 좋은 물건을 내놓으면 팔린다는, 누구든지 수긍할 수 있는 법칙 같은 게 있잖아요. 하지만 쓰는 일에는 모범답안이 없어요. 더군다나 내 돈도 아니고 소비자가 열심히 물건을 사주고 직원들이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을 대신 쓰는 것이거든요. 여기에 도움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필요한 도움을 받았다고 느껴야 하는 곳에 써야 하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전 사장은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고 한다. 우선 남들 다 하는 일보다 안 하는 일을 찾자, 정부가 아닌 민간이 해야 할 일 중에서 개인이나 중소기업이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커 삼성 같은 대기업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마지막으로 현 시점에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10년, 20년 후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생길 것으로 예상되는 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가 훗날 다문화가정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2007년, 일에 전문성을 갖고 싶어 사회복지 석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어요. 당시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화두여서 이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 대안으로 이민 문제, 더 나아가 불법 이민자 문제에까지 관심이 가더군요. 어느 날 지방 행사에 가던 길이었는데 한 시골길에 군수 명의로 된 ‘결혼시켜 드립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거예요. 아무리 농촌총각 결혼 문제가 심각하다 해도 인륜지대사인 결혼을 저렇게 억지로 시켜서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실제로 불법 브로커가 낀 국제결혼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까.”

(본보 10일자에는 한국에 온 지 8일 된 스무 살의 베트남 새댁이 정신질환을 앓던 남편의 흉기에 숨지는 사건이 사회면 머리기사로 실렸다. 한 전 사장과의 인터뷰가 있었던 8일 저녁 일이었다.)

―요즘은 다문화가정에 대해 관심을 갖자는 게 유행처럼 느껴질 정도여서 사회적으로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지 않나요.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이혼율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간혹 결혼 상대 여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남자들도 있고, 일부 여성들은 국적 취득이라는 목표만 달성하고 도망가 버리기도 하지요. 가정이 파괴되고 버려지는 아이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대부분 초등학생이지만 사회와 이웃이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10년 후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한 전 사장은 다문화가정과는 별도로 국내에 불법 체류하는 외국인노동자의 자녀 문제도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이 아이들은 부모가 국적이 없기 때문에 학교도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통계 자체를 낼 수가 없긴 하지만 외국인노동자센터에 따르면 대략 2만 명의 아이들 중에 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100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하더군요. 최근에 ‘지구촌사랑나눔’의 김해성 목사가 이런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준비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죠.”

박사학위 논문 주제도 다문화가정으로 잡은 그는 앞으로 자신이 세운 재단을 통해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지원은 물론 그들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즉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 다문화가정 주부들과 한국 주부들이 어떻게 하면 잘 사귈 수 있는지를 고민해서 실천하는 일이다. 일차적으로 한국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도서지원사업을 벌였고 수기 공모, 연구지원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빈부격차가 너무 심해지고 있습니다. 가진 사람들의 책임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죠. 하지만 부자라고 해서 무조건 손가락질하거나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풍토는 변해야 합니다. 돈을 정당하게 벌었다면 많이 번 것에 대해서도 인정해주는 문화가 필요해요. 그러고 나서 그 돈을 잘 쓰도록 격려해주고 또 잘 쓰면 칭찬도 해주어야 합니다. 현직에 있을 때 미국의 한 자원봉사단체에 회사 명의로 2만 달러를 기부한 적이 있어요. 한국 돈으로 2000만 원이 약간 넘는 돈인데 삼성 같은 대기업의 기부금으로는 적다고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매년 활동보고, 행사소개 자료를 보내더라고요.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기부도 더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도 생활에 여유가 있으니까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물론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남을 도와주는 일이 주는 만족감이 커서 이게 결국 나를 위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봉사라는 게 돈이 많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베풀 수 있는 일이 참 많아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 열심히 젊은 날을 보내고 어느덧 은퇴를 앞두니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삶인지’ 하는 고민이 생기더군요. 결국 ‘나’라는 존재는 무인도에서 살지 않는 한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사회적 존재’ 아닙니까.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함께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죠. 좋은 일을 하면 남들이 좋아하니 돕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되는 거죠. 어떤 점에선 봉사도 이기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죠. 이것보다 더 높은 경지는 남들이 좋아하거나 말거나, 내가 누구를 돕는다 안 돕는다 하는 구분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겠지요.”

문득, 은퇴 후 나눔의 삶을 선택한 그에게 ‘인생의 정점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던 적은 없었는지’ 묻고 싶어졌다.

“현역 시절 후배들에게 ‘사람을 좇지 말고 일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사람을 좇지 않고 일을 좇아 살려고 노력했고요. 현직에 있을 때 ‘개인’의 업적은 한 개인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대개의 경우 ‘자리’가 만들어 줍니다. 이것을 착각해 내가 잘나고 뛰어나서 업적이 좋고 사람들이 나를 올려다본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요.”

한 전 사장은 “현직에 있을 때부터 ‘자리’라는 옷을 벗고 은퇴해 야인(野人)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조언했다. 이날 인터뷰 초반은 ‘돈을 버는 법’이 아니라 ‘쓰는 법’이었듯 마무리는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내려올 것인가’가 된 셈이다.

한 전 사장은 “요즘 내 주위에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자식들한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사회에 돌려주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다”며 “이런 분들과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며 좋은 일을 함께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기자는 ‘재산은 사회로 환원되어야 하는 보관증 같은 것’이라고 했던 워런 버핏의 말이 생각났다.

버핏은 거의 전 재산을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하던 날,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누가 내 돈을 잘 불려 줄까’ 하는 분야에는 전문가를 찾지만 ‘누가 내 돈을 잘 쓰게 해줄까’ 하는 분야에서는 전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분야의 전문가를 찾는 일이야말로 투자 재능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한 전 사장의 나눔 인생은 그의 말대로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생 2막이 어떻게 결실을 맺을지 기대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1974년 영남대 경영학과 졸업,

삼성그룹 공채 14기 입사

△1985년 삼성그룹 비서실 운영3팀 팀장

△1988년 삼성전자 관리담당 이사

△1991년 삼성그룹 비서실 재무팀 이사

△1992년 삼성그룹 비서실 경영지도팀장(상무)

△1993년 삼성문화재단 겸 복지재단 전무

△1997년 삼성문화재단 대표이사 부사장

△2000년 삼성전자 수원 주재 대표이사 부사장

△2001년 삼성전자 생활가전총괄사장 겸

디자인경영센터장

△2004년 삼성재단 총괄사장

△2007년 삼성사회봉사단 사장

△2009년∼ 삼성생명보험 상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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