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 행위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서울 양천경찰서 강력5팀 폐쇄회로(CC)TV 화면. 5월 11일에는 화면 위쪽의 3분의 1가량이 천장을 비추고 있다(왼쪽). 경찰은 5월 24일 화면을 다시 조정해 사각지대 부분이 없도록 했다. 사진 제공 국가인권위원회
■ 양천경찰서 피의자 22명 가혹행위 의혹 파문 피의자 입에 재갈물리고… 몽둥이 구타… 수갑채운 채 팔꺾기… 인권위, 피해자 진정 사실로 판단… 경관 5명 고발 경찰 “검거때 물리력 불가피”… 서장 등 8명 대기발령 화면에 제대로 저장안돼 은폐의혹… 검찰도 수사중
국가인권위원회가 마약 특수절도 피의자로부터 자백을 받기 위해 경찰관들이 가혹행위를 했다는 진정 내용을 확인하고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함에 따라 수사기관의 가혹행위 파문이 일고 있다.
또 동아일보 취재 결과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기간의 서울 양천경찰서 폐쇄회로(CC)TV 녹화자료가 저장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돼 경찰의 은폐 의혹도 일고 있다.
검찰이 4월부터 이 사안에 대해 수사를 벌여왔고, 경찰청은 양천경찰서장 등 경찰관 8명을 대기발령하고 자체 감찰 조사에 들어갔다.
○ 피해자 22명 “가혹행위 당했다”
인권위가 조사한 피해자 22명은 하나같이 일관되고 비슷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권위에 따르면 절도 피의자였던 A 씨는 3월 28일 오후 2시 50분경 절도 혐의로 붙잡혀 이송되는 과정에서 경찰관에게 주먹과 몽둥이 등으로 구타당했다. 다음 날 오전 11시경 사무실에서 조사 받을 때는 매트리스에 눕게 한 뒤 등 뒤로 수갑을 채운 채 팔을 꺾어 올리는 속칭 ‘날개꺾기’를 당했다. 고통 때문에 소리를 지르자 경찰이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스카치테이프로 입 주위를 둘둘 말았다고 A 씨는 진술했다. 그는 “혐의를 부인하면 가혹행위가 반복됐다”고 말했다. 공범이었던 B 씨는 같은 가혹행위를 당하다 보철이 깨지고 왼쪽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는 것. 지난해 9월 1일 집에서 체포된 C 씨는 1시간 넘게 수건으로 재갈을 물리고 가슴, 배, 허벅지 등을 구타당하는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고 여죄를 허위로 자백했다. 경찰은 ‘범행 의심이 가는 150건 중 80건을 네가 가져가라’고 C 씨를 다그쳤다. C 씨는 65건을 인정해 가혹행위를 피했다고 밝혔다.
○ CCTV 화면 저장 안돼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여부를 입증할 수 있는 조사실에 CCTV가 설치돼 있었지만 양천경찰서 강력5팀의 CCTV 서버에는 가혹행위 의심 시기의 화면이 저장돼 있지 않은 것으로 인권위가 확인했다. 인권위가 경찰에 CCTV 자료를 요구했지만 경찰은 “검찰이 서버를 압수수색해 5월 25일 화면밖에 없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권위가 경찰 CCTV 관리업체를 조사한 결과 피의자를 조사한 3월 9일부터 4월 2일까지 강력5팀의 CCTV 화면은 서버에 저장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CCTV 화면이 저장되는 곳이 3곳인데 뭔가 얽혀서 그 부분만 (저장이) 안 됐더라”고 얼버무렸다.
인권위는 경찰 사무실 CCTV 설치 각도를 위로 꺾어놓아 가혹행위를 할 수 있는 사각지대도 생겼다고 설명했다. 인권위는 가혹행위가 주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각지대에는 팔걸이가 없는 의자 3, 4개를 붙여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았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가혹행위의 증거로 구치소 입감 당시 보호관 근무일지, 의약품 수불대장 등에서 피해자 가혹행위 흔적과 병원 진료기록 등을 확보했다.
○ 사태수습에 급급한 경찰
양천경찰서는 이날 브리핑을 열고 검거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일이라고 해명했다. 경찰은 “Y 씨 등 진정인 2명의 경우 3월 마약 특수절도 혐의로 검거 당시 절도 후 공범들과 함께 한 여관에서 히로뽕을 투약한 뒤 서로 싸워 얼굴에 상처가 난 상태였다. 하지만 유치장에 입감된 Y 씨가 마침 감찰을 나온 검사에게 ‘조사 도중 경찰관에게 맞아 눈이 찢어졌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이어 “‘마약에 취한 Y 씨가 힘이 너무 세 ‘엎드려 있으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아 경찰봉으로 1회 때린 적은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의 가혹행위나 고문은 있을 수 없다며 나머지 가혹행위 피해자들은 인권위가 자료를 공개하지 않아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경찰청은 인권위 발표 후 강희락 경찰청장 주재로 긴급회의를 열어 정은식 양천경찰서장 등 관련자 8명을 대기발령하고 새로운 양천서장에 이재열 서울지하철경찰대장을 임명했다. 강 청장과 조현오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경찰 수뇌부는 인권위 발표 직전까지도 이 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지 못해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 청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고문행위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며 진상규명을 위한 감찰조사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서울남부지검은 이날 인권위 발표 직후 보도자료를 내고 “수사의뢰를 받기 전에 제보를 받고 독직(瀆職)폭행 의심이 있어 4월 2일부터 형사1부 감찰전담수사팀이 경찰관, 유치장 근무자, 의사 등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사권을 가진 검찰이 두 달 넘게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장영훈 기자 jang@donga.com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 수사기관 가혹행위 사례 2002년 檢수사관, 살인용의자 11시간 폭행 사망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 이근안 사건도 ‘악명’
국가인권위원회의 발표로 불거진 ‘서울 양천경찰서 피의자 가혹행위’ 사건은 2002년 10월 옛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에서 벌어진 피의자 폭행사망 사건 이후 이른바 ‘고문 폭행’이 사회적 물의를 빚은 것으로는 8년 만의 일이다. 서울지검 사건 이후 수사기관에서 가혹행위는 사라진 것처럼 여겨졌고, 그런 만큼 이번 양천경찰서 사건은 충격적이다.
2002년 당시 대검찰청 감찰팀은 서울지검 강력부 홍모 검사실에서 수사관 3명이 살인 혐의 용의자로 검거된 조모 씨를 돌아가며 마구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는 등 11시간 동안 폭행한 사실을 밝혀냈다. 문제를 일으킨 수사관들은 조 씨가 술에 취한 채 검거돼 조사실에서 범행을 부인하자 ‘기선 제압’을 해 자백을 받은 뒤 진술조서를 받을 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당시 김정길 법무부 장관과 이명재 검찰총장의 동반 사퇴, 홍 검사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독재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가혹행위 사건이었다. 그해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경찰청 대공분실에서 일어난 박 군 사건은 축소 은폐의혹까지 불거지면서 고문경찰관들은 물론이고 당시 경찰총수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됐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도 독직폭행 사건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80년대 중반 이 전 경감은 경기도경 공안분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상대로 ‘관절 빼기’ ‘볼펜심 꽂기’ 등의 고문을 한 혐의로 1988년 수배됐다가 10년 10개월 만인 1999년 자수해 징역 7년형을 받았다. 1986년엔 위장 취업한 여대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적으로 추행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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