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블랙리스트 확보땐 ‘SAT 수사’ 급물살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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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시행 ETS에 ‘문제유출 혐의자 담은 자료’ 요청
강남 학원가 초비상… 일부선 “불법근절 계기” 반겨

《미국교육평가원(ETS)이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블랙리스트’가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 문제 유출 사건의 뇌관으로 등장했다. 경찰은 SAT 시행기관인 ETS에 수사 자료를 요청하면서 SAT 문제 유출 혐의자들을 추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리스트도 포함시켰다. 이 블랙리스트에 누가 올라 있는지,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찰 수사도 블랙리스트에 따라 큰 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계좌추적과 세금 탈루 조사 등 경찰의 전방위 수사방침이 알려지면서 강남 SAT 학원가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 ‘블랙리스트’로 경찰 수사 확대

ETS의 블랙리스트는 이미 위력을 보인 바 있다. 23일 SAT 시험에서 문제지를 빼돌린 장모 씨(36)를 곧바로 검거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ETS는 시험장에서 문제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장 씨 등을 수사의뢰해 시험 종료 4시간여 만에 장 씨와 아르바이트 대학생 등 4명을 검거했다. ETS가 이 리스트를 경찰에 넘겨준다면 SAT 문제 유출 수사는 강남 일대 SAT 학원가 전체로 커지게 된다. 서울 수서경찰서 관계자는 25일 “미국 ETS 측에 수사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해 놓은 상태”라며 “한국에 파견됐던 시험 보안 담당자들이 본사 측과 협의해 결과를 통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현재 경찰은 장 씨가 빼돌린 문제가 외부로 유출된 증거를 쫓는 데 주력하고 있다. 23일 있었던 시험에서는 장 씨가 곧바로 체포되는 바람에 문제를 미처 외부로 전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에도 시험 당일 문제를 유출한 뒤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 파일의 흔적이 발견돼 외부 유출 가능성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장 씨는 25일 ‘증거자료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는 사유로 구속됐다. 경찰은 장 씨의 노트북을 압수해 e메일 전송 기록을 계속해서 분석하고 있다. 장 씨의 계좌도 수사 대상이다. 경찰은 장 씨의 계좌를 추적해 학원이나 학부모 간에 부정한 뒷거래는 없었는지 수사하고 있다.

○ ‘블랙리스트’에 떨고 있는 학원가


SAT 문제 유출 사건과 관련해 경찰이 수사대상을 서울 강남 일대 학원가로 확대하자 강남 학원가는 잔뜩 긴장한 분위기다. 그동안 정부의 어떤 사교육 대책에도 꿈쩍하지 않던 학원가는 “다음은 어느 학원 차례냐”라는 분위기 속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잔뜩 움츠러든 표정이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어학원 관계자는 “ETS가 문제 유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모은 ‘블랙리스트’를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수사대상에 오른 이들뿐만 아니라 한 번이라도 시험을 봤던 강사들은 몸을 사려 당분간 시험 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강남구 역삼동 P어학원 김모 실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학원가 전체에서 튀는 홍보나 적극적인 학생 유치를 당분간 자제하자는 분위기”라며 “잇따른 시험지 유출 사건으로 SAT 학원이 전체적으로 부도덕한 것으로 비치고 있어 다들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스타 강사가 있는 학원들은 홍보에 열을 올렸다. SAT ‘족집게 강의’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이 폭발하자 일부 어학원들은 강남구 대치동이나 신사동에 분점을 내기도 했다. 미국과 아시아 간 시차를 이용해 문제를 유출한 혐의로 입건된 김모 씨(37) 같은 ‘1타 강사’들은 학원 설명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신을 홍보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유명 강사가 있는 학원일수록 더욱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한 어학원 원장은 “강남의 유명 SAT학원 한 곳은 아예 봄 학기 수업을 취소한다는 소문도 들린다”고 전했다.

경찰의 강도 높은 수사에 오히려 반색을 표하는 학원도 있었다. 강남구 대치동 L어학원 이모 원장은 “문제 유출을 한 학원들은 불안하겠지만 정직하게 가르친 학원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갑다”며 “이번 사건으로 학원가의 부정이 밝혀져 정직하게 가르치는 학원이 잘되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사들이 SAT 시험에 응시했다고 해서 문제 유출이나 부정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이 원장은 “SAT 시험은 강사들이 직접 풀어봐야 앞으로 지문이 어떤 경향으로 나올지 등을 예측할 수 있다”며 “학부모들이 시험도 직접 보지 않는 강사를 신뢰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강남구 대치동 S어학원 본부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학부모들이나 학생들이 학원에 불법적인 일들을 은근히 부추기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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