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명위가 문제를 삼은 대목은 일제강점기 인촌 선생 일생의 극히 일부분을 침소봉대한 것이며 이마저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인촌 선생이 엄혹한 시기에 교육 언론 산업 분야에서 민족의 역량을 키워 독립의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공로는 간과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촌은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중앙학교는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의 요람으로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 인촌은 일제의 우민화 정책에 맞서기 위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인재양성에 진력했다.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해 민족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나서 일제가 1940년 8월 강제 폐간할 때까지 정간 4회, 발매금지 2000회 이상, 신문압수 89회, 기사삭제 연 2423회의 제재를 당했다. 또 인촌은 동아일보를 통해 도쿄 유학생 초청 전국순회강연회, 브나로드운동(한글보급)과 같은 민중계몽운동을 펼쳤으며, 민족영웅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현충사를 중건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사업도 펼쳤다.
인촌은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하고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나서는 등 민족경제 기반 조성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는 총독부의 탄압을 무릅쓰고 경성방직이 생산하는 광목에 ‘태극성표’ 상표를 달아 민족혼을 일깨우기도 했다.
또 인촌은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성학교와 도산 안창호 선생, 김좌진 장군, 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 등 독립운동가에게 비밀자금을 수차례 전달했다. 또한 일제 말 총독부의 창씨개명 종용도 끝내 거부했으며 일제로부터 어떤 훈장이나 작위도 받지 않았다.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서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으며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에도 힘썼다.
‘독립신문’을 창간했던 서재필 박사는 1947년 고려대 강연에서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했거나 일제치하에서 체포, 투옥됐던 독립투사들은 분명 애국자들”이라며 “그렇지만 인촌같이 국내에 남아 장래 한국의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자신의 생을 바친 사람 역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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